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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좌파든 우파든 포퓰리즘 설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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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포퓰리즘 유혹에서 벗어나기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세계가 포퓰리즘 정치로 홍역을 앓게 된 것은 대체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부작용과 커지는 경제적 불평등 같은 요인들이 그 배경에 있었다. 미국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가 우파 포퓰리스트라면 버니 샌더스는 좌파 포퓰리스트이다. 그리스의 시리자,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 프랑스의 국민전선, 영국의 브렉시트,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를 통째로 장악한 핑크 타이드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온통 포퓰리즘의 전성시대로 보인다.

한국, 고소득 국가임에도 우파보다 좌파 포퓰리즘 성향 강해
윤석열 정부가 우파 포퓰리즘인지는 논쟁적…좀 더 지켜봐야
국민의 삶 바꿀 수 있다면 개혁, 레토릭 머무른다면 포퓰리즘
전 정부 잘못 공격보다는 원칙에 입각한 시스템 개혁 힘써야

포퓰리즘의 핵심은 ‘적 만들기’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포퓰리즘은 흔히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한다는 뜻으로 ‘대중주의’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핵심은 대중이 아니라 ‘적’을 규정하는 데에 있다. 대중 혹은 인민의 적을 규정해놓고 대다수 인민을 그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치 노선이다. ‘적’은 보통 그 사회의 ‘엘리트’라고 규정되지만, 외부의 적으로 규정될 때도 많다. 포퓰리즘은 인민의 뜻을 반영한다며 직접민주주의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인민을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포퓰리즘이라 하면 우파 포퓰리즘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우파 못지않게 좌파 포퓰리즘도 기승을 부린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북반구는 우파 포퓰리즘, 남반구는 좌파 포퓰리즘이 장악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고소득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우파 포퓰리즘,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국가들은 좌파 포퓰리즘으로 나뉘기도 한다. 흥미로운 예외 사례는 한국이다. 북반구의 고소득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좌파 포퓰리즘 성향을 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는 우파 포퓰리즘의 경향도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둘 중 무엇이 더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냐고 묻는다면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좌파 포퓰리즘은 흔히 반(反)엘리트주의, 반(反)기득권주의, 반(反)자본주의, 반(反)글로벌라이제이션, 사회정의, 평화주의, 민족주의 같은 흐름들과 손잡는다. 우파 포퓰리즘도 반엘리트·반기득권이라는 점에서는 좌파 포퓰리즘과 공통점을 갖지만, 소수자 집단의 권리를 내세우는 좌파 포퓰리즘과 달리 오늘날 북반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우파 포퓰리즘은 무엇보다도 이민자에 대한 적대적 태도라는 강력한 공통분모를 가진다.

반여성·반페미니즘에 대한 비판

윤석열 정부가 우파 포퓰리즘인지 여부는 논쟁적이다. 어떤 이들은 우파 포퓰리즘이라고 강력히 비판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아직 위태로운 줄타기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기득권 카르텔을 척결하겠다는 반복적인 강조는 포퓰리즘의 혐의를 풍기지만, 아파트 철근을 빼먹는 건설 카르텔처럼 구체적인 대상과 범죄를 적시할 수 있다면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윤석열 정부가 국제적으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은 여성가족부 폐지와 같은 반여성·반페미니즘 정책이었다.

다른 선진국의 우파 포퓰리즘을 관통하는 이민자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아직은 한국에서 충분한 조건 자체가 무르익지 않은 상태이다. 한국에서 유의미한 이민자 집단이라면 북한 이탈 주민,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인데, 이들의 인권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정권의 성격을 규정할 정도의 충분한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합의 기회’ 외면했던 문 정부

결국 관건은 실력이다. 구체적인 타깃을 정확히 설정하고 국민의 삶을 바꾸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개혁이라 평가받을 것이고, 애매한 레토릭만 남발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써먹는다면 포퓰리즘이라 비판받게 될 것이다. 평가를 확정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문재인 정부와 현재의 민주당이 좌파 포퓰리즘인지 여부는 꽤 확정적이다. 대상이 분명치 않은 적폐청산, 부동산을 비롯해 경제적 상층에 대한 징벌적 세금, 북한과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비현실적 집착, 현직 장관이 나서서 죽창가를 운운할 정도의 민족주의와 반일감정 자극 등은 많은 전문가가 전형적인 좌파 포퓰리즘의 징후로 지적했던 것들이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선택이다. 문재인 정부 탄생의 배경이었던 촛불 광장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뿐 아니라 중도보수 성향의 국민까지 동참한 통합의 장이었다. 그는 통합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전무후무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포퓰리즘의 길을 선택하고 강성 지지층 뒤로 숨었다. 만약 그가 통합의 길을 선택하고 촛불 광장의 에너지를 사회적 대화와 타협으로 승화시켰더라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좌파 포퓰리즘 등장하기 좋은 환경

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현 대표에 이르면 포퓰리즘적 특성은 더욱 짙어진다. 그의 대선 출사표 자체가 ‘억강부약(抑强扶弱)’,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는 포퓰리스트 구호였다. 지구 위 어느 나라도 하지 않는 기본소득을 도입하고 상위 10% 국민에게 국토보유세를 부과해 재원을 충당한다는 구상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포퓰리즘 정책이었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뜻을 새겨보면 남의 돈으로 내 정치 하겠다는 구상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이미 소득세도, 재산세도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더 이상 상층 국민에게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과 0.73%라는 표차로 거의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다.

이재명이라는 걸출한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그의 개인적 특성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가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좌파 포퓰리스트는 계속해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쉽게 등장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고,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이후에도 오히려 현역 의원들이 앞다투어 충성을 인증하는 성공사례를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약 10년 전부터 한국 사회의 어려운 상황을 규정하는 세 개의 원인으로 양극화, 고령화,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해왔다. 양극화와 고령화의 부정적 효과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치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데, 지난 10년간 한국 정치는 양극화를 해결하기는커녕 나빠지는 사회 변화에 편승해 포퓰리즘으로 진화해버렸다. 재정학자들은 이미 고령화로 인해 향후 얼마나 급격하게 세수가 부족해질 것인지를 예측하고 대책을 촉구해왔고, 고령화의 진전에 있어서 한국보다 약 20년 이상 앞서있는 일본에서 나온 연구들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는지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그러니 현재 한국은 우파보다는 좌파 포퓰리즘이 등장하기에 더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원칙 없는 증세와 원칙 없는 감세

정부가 편성한 긴축예산을 설명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은 “전 정부가 푹 빠졌던 재정 만능주의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세금 낼 사람은 빠르게 줄어들고 세금의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으니 재정을 투명화·합리화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대 최고로 나랏빚을 늘려놓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안보와 경제에서 진보 정부가 더 낫다고 자랑하는 것은 공정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 정부 비판이 곧 현 정부 정책에 대한 설명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윤석열 정부 들어 이루어진 감세 조치들은 전 정부의 비민주적이고 과격한 증세를 원상회복하고 국제경쟁력을 되찾는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전 정부 비판에만 집중하다 보니 국민의 눈에는 좌파 포퓰리스트를 비판하는 우파 포퓰리스트로 비친다. 당장 보수 언론에서조차 부자와 대기업 세금 깎아주더니 세수 펑크 났다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이대로라면 원칙 없는 증세와 원칙 없는 감세를 번갈아가며 되풀이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고, 좌파 포퓰리즘이 득세할 수 있는 조건은 더욱 무르익어 갈 것이다.

목표는 시스템 개혁이 되어야 한다. “전 정부가 잘못했으니 바로잡는다”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나니 바로잡는다”가 되어야 한다. 좌파든 우파든 포퓰리즘 세력이 기생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성공 여부에 따라 잠시 보류해두었던 윤석열 정부에 대한 평가도 결정될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