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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윤의 퍼스펙티브

밑빠진 독 방치한 채 국민 부담만 늘리는 건강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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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눈 가리고 아웅’ 건강보험 재정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 위원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 위원

보건복지부가 내년 건강보험료 인상률 결정을 미루고 있다. 매년 8월 인상률을 결정해온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조규홍 장관은 낭비되는 재정을 줄이고 붕괴한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는 데 건강보험 재정을 어디에 얼마나 써야 할지 먼저 가늠한 후 건보료 인상률을 결정하겠다고 한다. 올바른 판단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정부가 낡은 정책은 복지부동으로 방치하고 새로운 정책은 이익집단에 휘둘려 왜곡한 결과, 한편에선 ‘응급실 뺑뺑이’ 같은 필수 의료체계 붕괴 현상이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선 막대한 건강보험 재정이 줄줄 새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조만간 건보료를 결정한다고 하니 이제까지 정부가 건보 재정을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한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건강보험은 3조6000억원이라는 큰 흑자를 냈고, 쌓인 적립금은 무려 23조9000억원에 달한다. 언뜻 보면 정부가 건보 재정을 잘 관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건보료 명목 인상률 낮아도 부과 대상 늘며 수입 크게 증가
지역가입자 소득파악률 90%대 됐지만 재산 기준 부과 그대로
병상 수 OECD 3배…불필요한 입원·수술 남발 재정 누수 막대
많이 걷고도 응급·소아·노인돌봄 등 써야 할 데 제대로 안써

매년 8.5%씩 늘어난 실제 건보료 수입

건보 재정을 알뜰히 관리해서 흑자가 날 수도 있지만, 보험료를 너무 많이 걷어도 흑자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2010~21년 사이 건보료 연평균 인상률은 2.3%로 같은 기간 근로자 평균 임금 인상률 3.0%에 비해 낮았다. 인상률만 보면 돈을 많이 걷은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같은 기간 실제 건보료 수입은 매년 8.5%씩 늘어나 보험료 인상률의 3.6배나 됐다〈그림 1〉.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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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술 같은 일이 가능한 이유는 정부가 건보료를 매기는 대상을 확대해왔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건보료를 매기지 않았던 이자 소득과 임대 소득에 대해서도 보험료를 걷고, 직장에 다니는 아들·딸이 있어도 본인 소득이 있으면 건보료를 내도록 했다. 2010~21년 건보료 인상률은 연평균 2.3%였지만, 보험료 부과 대상 확대 효과를 포함한 실질 인상률은 연평균 5.3%로 명목 인상률의 2.3배에 달했다. 쉽게 말해 이제까지 국민은 정부가 말한 것보다 건보료를 2.3배 더 내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이 아플 때 병원비 걱정하지 않고 치료를 받게 하려면 보험료를 더 걷어야 하고, 또 소득이 있으면 보험료를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 정부에 유리한 숫자만 내세우는 건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당장 올해부터라도 국민이 실제로 내년에 건보료를 얼마나 더 내야 하는지 솔직하게 알려야 한다.

과도하게 큰 재산보험료 비중

〈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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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건강보험료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직장 은퇴자나 자영업자 같은 지역가입자에게는 소득뿐만 아니라 집이나 자동차 같은 재산에 대해서도 보험료를 매긴다. 1980년대 지역가입자에 대해서만 재산보험료를 매기기 시작한 이유는 ‘유리알 지갑’인 직장가입자와 달리 자영업자의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국세청에 따르면 자영업자 소득 파악률은 91.6%까지 높아졌다고 한다. 이처럼 자영업자의 소득 파악률이 크게 높아졌지만, 정부는 지역가입자의 재산보험료를 낮추지 않고 있다. 2021년 지역가입자 보험료 10조원 중 재산보험료가 무려 약 4.5조원(45%)을 차지한다〈그림 2〉. 지역가입자의 소득파악률을 90%라고 가정하면 지역가입자의 합리적인 재산보험료는 소득보험료의 10% 수준인 0.55조원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재산이 있는 은퇴자나 자영업자는 8배나 더 많은 재산보험료를 내는 셈이다.

〈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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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주 연금소득자와 지방 거주 자영업자를 예로 들어 은퇴자와 자영업자가 얼마나 부당하게 과중한 재산보험료를 내는지 살펴보자〈그림 3〉. 은퇴해서 국민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이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다면 월 22만원을 내야 하는데, 이 중 17만원(78%)이 재산보험료이다. 이 은퇴자의 재산보험료 공정하게 매기면 월 보험료는 4분의 1 수준인 5만원에 불과할 것이다. 은퇴한 노인이 아파트 한 채 있다고 연금수령액의 40%를 건강보험료로 내야 하는 게 공정한지 의문이다. 지방에서 작은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부부가 월 163만을 버는데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고 있으면 월 26만을 건강보험료로 내야 하고, 이 중 11만원(44%)이 재산보험료이다. 이 자영업자의 재산보험료를 공정하게 매기면 월 보험료는 16만원으로 줄어든다.

은퇴자·자영업자 주머니 털어서야

선진국 중 재산에 건강보험료를 매기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며, 일본도 재산보험료 비중이 10%에 불과하다. 건강보험은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사회보장제도이다.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 안정에만 매몰되어 재산보험료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인 은퇴자와 자영업자의 주머니를 날강도처럼 털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자영업자 소득 파악률을 반영하여 지역가입자 부담을 대폭 낮춰야 한다. 24조원에 달하는 큰 규모의 적립금이 쌓여있는 지금이 건강보험료를 공평하고 정의롭게 걷는 체계로 전환할 수 있는 적기이다. ‘소득 중심으로 건강보험 부과체계를 개편하여 보험료 부과의 형평성을 제고’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라는 사실도 덧붙인다.

〈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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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을 알뜰하게 써왔는지 살펴보자〈그림 4〉. 기형적인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여기저기 금이 가고 구멍이 난 항아리에서 물이 새는 것처럼 건보 재정을 낭비하게 한다. OECD 국가보다 3배나 더 많은 병원 병상을 환자로 채우기 위해서 병원과 의사는 의학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입원과 수술을 남발한다. 여기에 매년 건강보험진료비 약 11조원이 낭비된다. 고혈압,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자를 지속해서 관리해주는 주치의가 없어 심장병, 뇌졸중 같은 합병증이 더 많이 생긴다. 만성질환이 관리되지 않아 응급실과 중환자실 진료비 등으로 약 5~9조원이 낭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손보험으로 인한 과잉진료로 약 5~8조원, 붕괴한 의료전달체계로 약 5조원이 낭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재정 누수액을 모두 합하면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의 약 30%에 달하지만, 지난 20여년 간 정부는 낭비를 부르는 왜곡된 의료체계를 방치해왔다. 이처럼 막대한 재정 누수를 고려하면 돈을 알뜰하게 써서가 아니라 돈을 많이 걷어서 재정 누수에도 불구하고 흑자가 난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체감 안 되는 필수의료 지원 대책

마지막으로 돈을 써야 할 곳에 쓰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윤석열 정부는 ▶모든 국민이 자기 사는 곳에서 응급·소아과 같은 필수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지역완결형 의료체계’를 구축하고 ▶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원해도 간병비를 걱정하지 않고 좋은 간호·간병을 받을 수 있도록 간호간병통합서비스 확대와 함께 요양병원 간병비 건강보험을 적용하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지역사회 노인 돌봄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같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재정을 대규모로 투자해야 하지만, 지난 1년 반 동안 국정과제를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추가로 투입한 건강보험 재정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1조원을 넘지 않을 것 같다. 지난 1월 정부가 응급, 중증, 소아 진료를 강화하기 위한 ‘필수의료 지원대책’을 발표한 지 7개월이 지났지만 국민은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 정부는 효과가 나려면 시간이 더 지나야 한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정부 대책을 찬찬히 뜯어보면 기다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언제까지 얼마나 돈을 들여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제도의 목표는 돈을 적게 쓰는 게 아니라 국민이 필요할 때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국민은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진료 대란으로 고통받고 불안한데, 써야 할 곳에 돈을 쓰지 않고서 흑자를 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건보재정 흑자가 무조건 자랑 아냐

요약하자. 첫째, 건강보험료 명목 인상률과 함께 건강보험료 부과 대상 확대 등으로 인해 실제 국민의 보험료 부담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보여주는 보험료 실질 인상률을 함께 공개해야 한다. 둘째, 현재 소득보험료 대비 80% 수준인 지역가입자의 재산보험료를 10%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셋째, 병상 과잉 공급 등 왜곡된 의료체계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누수를 줄임과 동시에 윤석열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국정 과제를 이행하는 데 건강보험 재정을 제대로 써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지역완결형 의료체계 구축, 간호간병통합서비스 확대, 요양병원 간병비에 건강보험 적용, 지역사회 노인돌봄을 확대하기 위해 어디에 얼마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할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