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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회숙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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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진회숙 음악평론가

진회숙 음악평론가

피아노 3중주는 피아노·바이올린·첼로가 함께 연주하는 실내악 양식이다. 그런데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왼쪽 사진)는 이 세 악기가 동시에 울리는 소리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생 피아노 3중주곡을 단 하나만 작곡했다. 그가 평소 꺼리는 양식에 손을 대게 된 것은 가까운 친구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오른쪽)의 죽음 때문이었다.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연주 여행 도중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차이콥스키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는 루빈스타인의 후임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장으로 부임해 달라는 부탁을 뿌리치고 친구의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 여행길에서 루빈스타인을 추모하는 피아노 3중주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를 썼다.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이 작품의 피아노 파트는 루빈스타인의 위대한 음악성에 대한 일종의 헌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라는 제목이 없이도 이 작품은 무언가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분산화음으로 조용히 시작되는 피아노에 이어지는 표정 풍부한 첼로와 바이올린 선율이 깊은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비애와 애수, 그리고 아련한 향수가 비로소 구체적인 청각적 실체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 그래서 마치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옛 추억의 이야기가 조용히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은 일생의 친구를 잃은 차이콥스키의 애수와 고독을 음악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가 사랑하던 친구 루빈스타인을 위해서 평소 거부감을 가졌던 피아노 3중주라는 형식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나이 마흔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일생 동안 이 형식을 아꼈던 것은 어쩌면 루빈스타인을 위한 최후의 걸작을 만들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단 하나의 유일한 작품으로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축복해 주었던 것이다.

진회숙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