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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경제 쇼크 온다"…英 연금 고갈, 여야는 '폭탄 돌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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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왼쪽)와 제1야당인 영국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 AFP=연합뉴스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왼쪽)와 제1야당인 영국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 AFP=연합뉴스

연금개혁 모범 사례로 평가받던 영국이 또다시 연금개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연금 고갈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집권 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은 내년에 있을 총선에서 노년층 표를 의식해 제도 폐지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다. 여야가 마치 폭탄을 돌리듯 연금개혁 문제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자칫하면 영국에 '연금 발(發) 경제 쇼크'가 불어닥칠 것이란 우려마저 나온다.

최근 연금 논란에 불을 지핀 건 멜 스트라이드 노동연금부 장관이다. 스트라이드 장관은 지난 12일(현지시간) BBC 라디오에 출연해 “(13년 전 도입한) 공적 연금의 삼중 잠금(triple lock) 제도는 더는 지속가능성이 없다"며 "다른 사람(미래 세대)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중 잠금 제도는 2010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핵심 공약이었다. 한국의 국민연금 격인 ‘신국가연금’에 대해 매년 ▶임금상승률(매월 5~7월) ▶소비자물가상승률 ▶정부가 정한 최소 연금 급여 상승률(2.5%) 등 세 가지 지표 중 가장 높은 것에 연동해 이듬해 연금 지급 수준을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연금 급여의 실질 가치를 보장하고 은퇴 후 노년층이 갑작스럽게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제도는 노년층의 표몰이를 이끈 '효자 공약'이 됐고, 보수당이 1996년 이후 14년 만에 정권을 재탈환하는데 기여했다. 보수·자유민주당 연립정부인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가 제도를 도입하기 10여 년 전 전체 고령 인구의 30%에 육박하던 노인 빈곤율은 제도 도입 3년 후 15%까지 낮아지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래픽=김영희 기자 02@joongang.co.kr

그래픽=김영희 기자 02@joongang.co.kr

인플레 덫이 된 삼중 잠금 제도 

하지만 저성장, 저물가 상황에서 도입됐던 이 제도는 살인적인 고물가 상황을 겪고 있는 현재 영국 경제에 덫이 돼 버렸다. 연금 상승률이 지표에 연동되다 보니 임금상승률·소비자물가상승률이 오르면서 영국 재무부의 고민도 덩달아 깊어지고 있다. 지난 12일 발표된 영국의 임금상승률은 7.8%로 물가상승률보다 높다. 성과급을 포함한 임금상승률은 8.5%에 달한다. 삼중 잠금 제도를 적용하면 내년에 1200만명의 퇴직자에게 지금보다 8.5% 인상된 연금을 줘야 한다.

올해 4월 영국의 신국가연금은 전년도 물가상승률에 맞춰 10.1% 인상된 월 134만원 정도인데, 내년 4월은 올해 수치를 반영해서 8.5% 인상분인 월 147만원 정도를 1200만명 퇴직자가 받게 된다. 영국 재정연구소(IFS)에 따르면 연금 지급을 감당하기 위해선 영국 납세자들이 추가로 20억 파운드(3조2900억원)의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실제로 영국의 2010년 이후 국가 연금은 약 60% 오른 반면 평균 소득은 40% 인상됐다. 노동에 대한 보상보다 연금 지급 규모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양상이다.

향후 상황은 더 안 좋다. IFS에 따르면 50년 뒤면 영국인 4명 중 1명은 연금 수급자가 된다. 반면 출산율 감소로 노동 가능 연령은 지금보다 3분의 2 미만으로 줄어든다. 쓸 돈은 많고 곳간을 메울 사람은 적은 상황에서 삼중 잠금 제도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IFS는 "이대로 가면 신국가연금 지급 규모가 50년 안에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17.5%에 가까워진다"며 "국가 재정이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 인디펜던트는 "가난한 연금 수급자, 노령 빈곤층을 위한 안전망 역할을 했던 신국가연금의 삼중 잠금장치가 이제 나라 곳간을 좀먹는 제도가 됐다"며 "현재 40세 미만인 젊은층은 연금 자체가 아예 사라질 것이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대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도 보인다. 영국 싱크탱크 애덤스미스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영국은 노인 정치 시대에 살고 있다”며 “영국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손해를 보고 노인들이 혜택을 받는 등 세대 간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짚었다. 지난 10년간 경제 변동성이 컸는데, 이에 따른 연금 제도 손질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불공평한 결과물을 미래 세대가 오롯이 짊어지게 됐다는 지적이다.

그래픽=김영희 기자 0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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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못 멈추는 폭주 열차

상황이 이런 데도 노인 표를 놓치기 싫은 영국 정치권은 총선 이후로 판단을 미루고만 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변동 없이 삼중 잠금 제도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선거 이후에도 유지하겠다는 보수당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느냐"는 연금학자들의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삼중 잠금장치 도입에 관여했던 전 자유민주당 소속 스티브 웹 하원의원은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제도를 버리는 건 집권 보수당이 표밭 중심부에 미사일 폭격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당도 제도 폐기 목소리를 전면으로 내세우기보다 '하기 싫은 결심'을 보수당이 대신해 주길 바라는 입장이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전 한국연금학회장)은 "근본적 대책 마련이 아닌 정치적 판단에 따라 나온 제도가 얼마나 큰 사회적 손실을 불러일으키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며 "영국처럼 과거 일찌감치 연금개혁에 성공한 국가도 재정 불안 요소가 언제든 다시 생겨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독일·일본·스웨덴 등이 시행 중인 평균수명, 출생률, 경제성장률 등 여건 변화에 맞춰 연금 지급을 달리하는 '연금 자동 안전장치' 도입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영국 정가의 모순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역시 국민연금 지출 속도가 수입보다 4배 빨라 2055년이면 기금이 바닥을 드러낼 공산이 크지만,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하 순천향대 IT 금융경영학과 교수는 "영국의 상황은 주어만 바꾸면 한국과 다를 바가 없다"며 "연금개혁을 추진해 책임 정당이 될지, 연금개혁을 미뤄 미래 세대에 전가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를 놓고 정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조율·타협해 실행에 옮기는 게 진정한 '연금 정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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