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리더스 프리즘] 가을의 명령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58호 30면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우리네 인생은 의외로 비극적이다. 아니, 당연히 비극적이다. 왜냐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의 날을 예약했기 때문이다. 하기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사망의 날이 예약되어 있으므로 비극적이다.

그렇다 해서 모든 생명체의 삶이 과연 비극이기만 한가. 절망적이기만 한가. 그건 그렇지 않다. 인간이나 모든 생명체는 사는 동안 충분히 즐겁고 아름답고 희망적일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한다. 생명 가진 존재의 노력이다.

행복도 연습…나의 좋은 점 찾아야
추석엔 마음속 대리석 궁전 짓길

가령 우리가 웃어서 기쁜가? 기뻐서 웃는가? 그 둘이 모두 답일 수 있다. 행복이란 것도 그렇다. 처음부터 저절로 행복한 사람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주변을 살피면서 행복한 마음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도 하나의 발견이고 어쩌면 억지로 갖는 마음이란 것이다.

그건 정말 그러하다. 행복도 학습이고 하나의 연습이다. 날마다 나는 그 무엇도 되는 일이 없고 모든 것이 남보다 뒤떨어져 있고 부족하다는 생각만 하면 그 사람은 여지없이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정말이지 모든 행·불행은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자기를 찾을 일이다. 자기가 가진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찾아야 한다. 남보다 못한 점을 찾지 말고 남보다 나은 점, 좋은 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서 그것에 대해서 만족해하고 기뻐하고 더 좋은 일을 꿈꾸어야 한다.

요즘은 계절이 뒤죽박죽이고 또 지각하기를 잘한다. 내가 여름철 한 철 즐겨 입는 삼베옷이 있는데 그 옷을 벗지 못한 채 9월을 보내고 있다. 이 또한 매우 비극적이고 절망적이기까지 한 일이다. 이상 기후 때문에 그렇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숨이나 쉬고 어두운 생각에만 빠져 있을 것인가. 절대로 그건 그렇지 않다. 심기일전하여 일어나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가을의 명령이고 주문이고 의무 사항이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그러는데 이것 또한 노력하자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어찌해서 가을이 독서의 계절인가. ‘가을에는 종그래기도 놀지 않고 고양이도 집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수확의 일이 바쁘고 힘들다는 얘긴데 그런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삼다니, 이거야말로 억지 춘향이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도 짬을 내어 책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 또한 억지로 그래 보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조금쯤 머뭇거리기는 하지만 올해도 가을은 분명히 올 것이다. 벌써 가을은 우리 앞에 와서 우뚝 서 있다. 가을은 해마다 좋은 계절. 한 해를 수고하면서 견뎌 온 보람이 가을에 있고 다시 한 해를 살아갈 에너지를 가을에서 얻는다. 양식이며 과일이 가을에 익어 수확된다는 말을 이렇게 에둘러 하는 것이다.

추석 명절이 가을에 있는 건 매우 타당한 일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추수감사절. 요즘은 조금쯤 달라지기는 했지만, 추석 명절에 고향을 찾는 풍습은 매우 아름다운 전통이다. 정이나 형편이 맞지 않는 사람은 못 그러겠지만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을 것이다. 먼 길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길을 떠날 것이다.

비록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고향을 생각하며 그 기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고향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사건으로 기억되고, 공간으로 기억되는 그리움의 근거 같은 장소. 영혼의 본거지 같은 곳. 고향에 얽매일 일은 아니지만 고향을 부정하거나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 자체가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멈칫거리는 가을이라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 아침저녁으로 어느새 바람 시원하고 열어놓은 유리 창문으로 유난히 새하얀 구름 높이 높이 솟아오른다. 전형적인 가을 구름이다. 나는 이 구름을 하늘에 대리석 궁전을 짓는 구름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마음속에 대리석 궁전 한 채씩을 지어 볼 일이다.

나태주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