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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도, 인공지능도 그 머리에서 나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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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22면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아난요 바타차리야 지음
박병철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존 폰 노이만(1903~1957)이라는 이름은 20세기 과학기술사에서 보이지 않는 분야가 드물 정도의 ‘르네상스맨’이다. 수학에선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을 두루 섭렵했다. 물리학에선 양자역학·유체동역학·핵물리학·탄도학을 연구했다.

경제학에선 수학모델을 바탕으로 하는 게임이론이, 컴퓨터공학에선 디지털 컴퓨터의 기본 구성방식이 된 폰 노이만 구조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가 “특정 상황에서 스스로 재생하고, 자라며, 진화하는 정보처리 장치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 것이 1948년이었으니, 이미 75년 전 인공지능(AI)·신경과학의 문을 연 선구자다.

1956년 미국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는 노이만. 암 투병 중이던 그는 이듬해 별세했다.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1956년 미국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는 노이만. 암 투병 중이던 그는 이듬해 별세했다.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영국의 과학저술가인 지은이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21세기는 폰 노이만이 남긴 수많은 업적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인터넷·스마트폰·나노과학은 물론 경제와 경영, 투자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빚지지 않은 분야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심지어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로토늄 핵폭탄 ‘팻맨’의 개발이나 소련과의 핵전쟁 전략에도 관여했다.

그는 역사의 파편에 맞은 망명객이다. 너이먼 야노시 러요시(헝가리어는 성을 앞에, 이름을 뒤에 놓는다)라는 이름의 유대계 헝가리인으로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당시 유대인 지성인들이 많이 살아 친나치 인물이 ‘주다페스트’(유대인+부다페스트)로 불렀을 정도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연구하던 그는 나치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에선 프린스턴대 고등연구소(IAS) 교수로 일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몸담았고, 최근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소장을 맡았던 IAS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 분위기로 미국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열었다.

지은이는 IAS의 동료들이 그가 아인슈타인이나 오펜하이머보다 천재성에서 앞선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소개한다. 폰 노이만은 수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문을 새롭게 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알게 된 독일 출신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공동 연구해 1944년 펴낸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이 대표적 결과물이다. 그가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게임이론은 20세기 경제학과 경영학을 뿌리째 바꿔놓았고, 정치학·심리학·진화생물학은 물론 법학·사회학·인류학·공학·컴퓨터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용·연구되고 있다.

군사 분야에서도 핵전쟁 계획과 최소 손실로 수행할 수 있는 전략폭격 작전 수립에 영향을 줬다. 그는 냉전 시기 보수파의 한 사람으로서 소련과의 핵 대결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인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냉전과 핵전쟁을 비꼰 블랙코미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전직 나치로 휠체어에 탄 핵전쟁 전문가’로 설정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모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언어와 인문학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모어인 헝가리어는 물론 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구사했으며, 비잔틴사 등 역사에도 해박했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지식과 창의력을 발휘한 ‘르네상스맨’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허술한 점도 적지 않았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 출신인 그는 돈을 마다하지 않았고, 권력자들과 교분을 즐겼다. 값비싼 파티를 즐기면서 수수한 미국인이나 부유층 출신이 아닌 사람을 얕잡아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미국식 ‘존’으로 바꾸면서도, 성에 들어있는 독일어 귀족 칭호인 ‘폰’은 그대로 남긴 것은 그의 속물근성을 보여주는 일화다. 자신의 부친이 귀족 지위를 돈으로 사면서 얻었던 것인데도 말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3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20세기 광풍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일지도 모른다.

그는 학문과 생각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취미도, 재주도 없었다. 운전을 좋아했지만 서툴렀는지 거의 매년 사고를 내고 차를 바꿔야 했다. 프린스턴의 동료들은 그가 자주 자동차 사고를 낸 곡선도로를 ‘노이만 코너’로 불렀다. 체스에서 이기는 수학적 방법을 고안했지만 정작 실력은 고만고만했다. 스키를 타러가자는 부인에게 ‘이혼’을 거론했을 정도로 운동에 질색이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오펜하이머 외에 그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선배·동료·제자로서 만나고 교류한 숱한 과학자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수학자·논리학자·철학자인 쿠르트 괴델과 게임이론에 입각한 ‘죄수의 딜레마’로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시, 양자전자역학 연구로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먼 등과의 일화가 끝없이 등장한다.

프린스턴대 제자이던 영국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 앨런 튜링의 어린 모습도 생생하다. 튜링이 수학경시대회에서 우승해 부상으로 받은 폰 노이만의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 독일어판을 소설 읽듯 술술 읽고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다”는 감상문을 어머니에게 보냈다는 일화는 ‘천재들의 행진’을 보는 듯하다. 원제 The Man From the Future: The Visionary Life of John von Neumann.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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