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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법원-지연된 정의 남겼다…퇴임사로 본 김명수 대법 6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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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64·사법연수원 15기) 대법원장이 22일 퇴임식을 가졌다. 6년 전 대법원장 후보로 나서며 도종환 시인(현 국회의원, 당시 문체부 장관)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을 읊었던 그는, 떠나는 날에는 ‘좋은 재판의 길’을 말했다. 이날 그의 퇴임사를 통해 ‘김명수 코트’ 6년을 돌아본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6년 전 사법부와 관련된 대내외적인 여건이 그 어느 때보다 엄중했던 상황에서, 국민은 제게 16대 대법원장의 막중한 소임을 부여했습니다.” 2017년 8월은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번지던 때였다. 법원행정처가 진보 성향 법관들이 다수 포진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탄압하려 했다는 의혹은 양승태 대법원장의 거듭된 조사에도 커져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격랑을 맞은 사법부를 이끌 다음 수장으로 전수안·박시환 전 대법관을 고려했으나 모두 고사한 뒤 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을 깜짝 발탁했다.

“새로운 사법의 길은 그 길을 찾아가는 절차와 방식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김 대법원장은 법관 인사 체계의 근간에 손을 댔다. ‘법관의 꽃’이라 불린 고등부장을 더 이상 임명하지 않았고, 고등부장을 각급 법원장에 보내는 대신 각 법원 투표를 거쳐 추천을 받았다. 이를 개혁으로 보는 시선도 있지만,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로 구성원들이 일할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와 법원장 자리를 사실상 인기투표에 맡겼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권위를 앞세우는 지도자이기보다는 누구와도 대화하고, 경청하며, 서로의 견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열린 동료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법원행정처를 정점에 두고 수직적으로 움직이던 법원의 조직이 김 대법원장 이후 수평화됐다는 것은 긍부를 떠나 법원 구성원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판사 수를 이전의 3분의 1로 줄이고, 전국법관대표회의·전국법원장회의·사법행정 자문회의를 상설화했다. 법원 내부의 의사결정이 민주화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인적 자원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지 못해 비효율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작지 않다. ‘벙커(힘들게 하는 선배 판사)’란 단어 못지않게 ‘벙키(힘들게 하는 후배 판사)’란 단어가 많이 쓰이는 게 요즘 법원이다.

“그렇지만 ‘좋은 재판’을 실현하는 과정은 곳곳에 암초가 도사린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전 세계가 유례없는 감염병 위기를 겪으며 법원도 멈춰섰다. 한 달에 한 번씩은 하던 전원합의체 선고는 2020년 2월 이후엔 석 달이 지난 5월에야 재개됐다. 전국 법원에 구속 사건만 빼고 3주간 쉬어가라고 권고해야 했던 때도 있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코로나 19를 재판 지연의 주범으로 꼽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 취임 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해소였으나, 그는 후임자에게 ‘극심한 재판 지연’이라는 못지 않은 난제를 남겼다.

지난 21일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김 대법원장은 퇴임을 사흘 앞둔 이날 마지막 선고를 했다. [대법원 제공]

지난 21일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김 대법원장은 퇴임을 사흘 앞둔 이날 마지막 선고를 했다. [대법원 제공]

“지난날 사법행정이 저지른 과오가 우리 사법의 역사에서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법원 자체 조사는 양 전 대법원장 때 1·2차, 김 대법원장 이후 3차로 이어졌다. “수사가 진행될 경우 미공개 문건을 포함해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모든 인적·물적 조사자료를 제공하겠다(2018년 6월 대국민 담화)”던 그는 말을 실천에 옮겨 모든 자료를 검찰에 내줬다. 그 결과는 헌정사상 첫 전직 대법원장 구속기소였다. 양 전 대법원장 외에도 13명의 법관이 기소됐고, 한때 ‘엘리트’로 불리던 많은 판사들이 법원을 떠났다.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수용하면서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최후 보루로서의 역할과 사명에 혼신을 다해야 합니다.” 대법원은 지난 6년간 116건의 전원합의체 선고를 했다. 삼성 반도체 산재 인정,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미성년 자녀를 둔 트렌스젠더 성별 정정 허가 등 노동·소수자 권익을 강화하는 판결을 잇따라 냈다. 그 과정에서 ‘좌파 대법원’ 논란도 거세졌다. 특히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의 위법성 인정 결정은 노조 편향성 논란을 불렀고 양 전 대법원장 때 고의 지연 의혹이 제기됐던 강제징용 손배소 사건을 피해자 편에서 마무리한 것은 외교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저의 불민함과 한계로 인해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점을 저는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2018년 11월,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1인 시위를 벌여오던 남성이 김 대법원장의 출근 차량에 화염병을 던진 일이 있었다. 2021년 2월에는 대법원 앞에 그를 비난하는 근조 화환 100여개가 늘어서기도 했다. 탄핵 대상이 된 판사의 사표를 받아주지 않고, 이에 대해 국회에서 거짓 해명을 했다는 사실이 녹음 파일을 통해 드러나자 시민들은 분노했고 법원 구성원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시작된 검찰 수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훌륭한 신임 대법원장님과 함께 사랑하는 법원 구성원 여러분이 ‘좋은 재판’의 길을 실현하는 여정을 계속해 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김 대법원장의 퇴임사는 ‘훌륭한 신임 대법원장’으로 마무리됐다. 역대 대법원장 퇴임사마다 들어갔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퇴임사에 차마 넣지 못했던 덕담이다. 그러나 아직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투표도 이뤄지지 않아 당장 25일부터 안철상 선임 대법관이 권한대행을 맡는다. 내년 초 세 명의 대법관이 임기를 마치고 법관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애서, 대법원장 공석 사태가 장기화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법조계에 감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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