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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정치에서 감동 느껴본 게 언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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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어제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빅데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국회에서 큰일이 벌어진다는 의미였는데, 제1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과 내각 수반인 국무총리에 대한 해임건의안 표결이 동시에 진행된 초유의 일이었다. 두 건 모두 법적 요건을 갖추면 표결하는 사안인 건 맞지만, 우리 정치가 처한 갈등 상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을 만했다.

 표결 결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과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이 모두 가결됐다.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오면서 이 대표는 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됐고, 이 대표의 혐의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재판에서 판가름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 대표는 국민과 한 약속을 번복했다는 오명을 남겼다.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가결 선포 직전 민주당 의원들이 모여 있다. 강정현 기자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가결 선포 직전 민주당 의원들이 모여 있다. 강정현 기자

 지난 2월 이 대표의 대장동 의혹에 대한 1차 체포동의안이 부결됐었는데, 그 후 당 혁신위원회가 불체포특권 포기 당론을 권고했다. 민주당은 그러자 ‘정당한 영장 청구 시’라는 꼬리표를 붙여 당론으로 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대표는 지난 6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불체포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검찰이 소환한다면 응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제 발로 출석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겠다는 다짐이었다.

이재명 체포동의안 가결 안팎
돈봉투 의혹도 ”검찰 조작” 주장
야당 살려면 '바보 노무현' 필요

 하지만 이 대표는 어제 표결을 앞두고 “명백히 불법 부당한 체포동의안의 가결은 정치검찰의 공작수사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라며 부결을 요구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글 분량만 2000자에 육박했다. 불체포 특권은 어차피 회기 중 영장 청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약속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급기야 단식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게 됐다.

 역대 정부에서도 야당은 검찰 수사에 항의한 적이 많다. 하지만 특히 야당 지도자의 언행은 지지자는 물론 중도·무당층에까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정치적인 효과를 낸다. 정권을 내주고 예산을 수립하거나 정책을 집행할 권한이 없는 야당이 됐다면 국민 여론에 울림을 줄 행보를 해도 선거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그동안 정부·여당 비판 외에 유권자와 어떤 공감을 끌어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민주당 일부의 합류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만큼 이 대표는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사법부의 무대에서 정당하게 평가받기 바란다.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과 연관된 민주당 의원들의 반응 역시 실망스럽다. 구속기소 된 무소속 윤관석 의원 측이 법정에서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으로부터 100만 원씩 담긴 돈 봉투 20개를 받았다고 시인했다. 혐의 사실을 부인하던 입장을 뒤집고 일부를 인정한 것이다. 정당법상 처벌을 가볍게 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관련 녹취록이 보도되는 와중에도 ‘검찰의 조작’이라며 반발했던 발언이 무색하다.

 관련자들의 실토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부터 ‘정치적 기획수사’라는 반발 대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당의 지도층 인사들부터 숨기에 급급한 모습이라면 민주당이 국민과 호흡하는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

 민주당으로선 여당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만하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2019년 자유한국당 집회에서 "이완용이 비록 매국노였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고, 과거 12·12 쿠데타를 두고 ”공백기에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나온 것“이라고 평가해 논란이 되고 있다. 개각을 한다면 창의적인 인물을 발굴해 내각에 수혈해야 할 텐데 어떤 기준으로 후보자를 고른 것인지 감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윤희숙 전 의원이 국민권익위원회 조사 결과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되자 의원직에서 사퇴하는 식의 행동을 보여준 적이 있다.

 민주당 계열에서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정치인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꼽힌다. 그는 당선 가능성이 있는 서울 지역구 출마를 거부하고 2000년 4월 16대 총선 당시 부산 북강서을로 갔었다. 패배 가능성을 알면서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출마를 강행해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노 전 대통령은 선거사무실 해단식에서 “한순간의 승리가 모든 것은 아니다. 결코 헛일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자기희생은 2002년 대선 승리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내년 총선까지 여야가 경쟁하겠지만, 특히 야당은 국민에게 대안이라는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승리의 동력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신뢰 회복은 자기희생과 내려놓기가 있어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