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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지금?

중앙일보

입력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필자가 고3이던 1980년 7월 말이었다. 한 친구가 여름 보충수업 중인 교실 문을 열고 외쳤다. “본고사 없어졌다.” 선생님은 “날이 더우니 헛소리를 다 하네”라며 혀를 찼다. 사실이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했다. 당시 본고사가 너무 까다로워 원성이 자자했다. 고액 과외가 성행했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결정해 급하게 밀어붙인 데 있었다. 입시 3개월 앞두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 우왕좌왕했다. 그해 11월,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시험)만으로 81년도 입시를 치렀다. 진학지도 정보가 없어 선생님들이 손을 놓았다. 이 성적으로 어느 대학에 응시할지 알 길이 없었다. 요행을 노린 배짱 지원과 미달 사태로 뒤죽박죽이 됐다. ‘점쟁이만 특수를 누렸다’는 웃지 못할 보도가 나왔다. 혼란은 이듬해 입시에서도 이어졌다.

홍범도 논란처럼 뜬금없는 일 잦아
영문을 모르는 국민은 혼란스러워
정부 열심히 하고 점수 못 따는 이유
국민과 소통하며 큰 일에 집중하길

 지난 6월 정부가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기로 한 취지에 공감한다. 교과 밖 킬러 문항으로 수험생을 골탕 먹여선 안 된다. 교육계에 이권 카르텔이 있다면 당연히 손봐야 한다. 그런데 흔쾌하지는 않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다들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수능이 코앞에 닥쳤지만, 어떤 게 킬러 문항인지 여전히 헷갈린다. 지난주 킬러 문항을 뺀 처음이자 마지막 모의평가를 치렀다. 과목별로 변별력 논란이 이어진다. 수학 만점자가 3000여 명인 의대 정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물수능 기대감으로 N수생이 역대 최대로 늘었다. 입시는 더 치열해진 셈이다. N수생이 몰려들며 입시 학원은 장사가 더 잘된다. 재학생이 빠져나가면서 대학은 비상이 걸렸다. 입시제도를 갑자기 바꿔서 생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홍 장군의 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가 활동한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 시절이다. 김일성을 앞세워 6·25 남침을 한 스탈린의 공산당과는 다르다. 홍 장군은 해방 전인 1943년 작고했다. 독립군을 몰살한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증거도 없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다”(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정부가 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 이전을 강행하는 느낌이다. 국방부 대변인은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문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가 기자들이 따지자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라고 번복했다. 오락가락하며 신뢰를 못 준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도를 갖고 일방적으로 추진했다고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하면 똑같은 수준이 된다. 역사 논쟁과 이념 싸움으로 흐르는 바람에 광주시 정율성 공원의 부당함을 공격할 기회도 놓쳤다.

 5년여 육군사관학교에 있던 흉상을 치우려면 국민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국방부는 “군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한 정상화 조치”라고 했다. 그럴수록 정부 단독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 전문가와 관련 단체 의견을 듣고, 공론화 과정도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외부 학계와 협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국방부 입장은 위험한 생각이다. 절차를 건너뛰면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논란이 꼬리를 물게 된다. 육사 흉상을 옮기면서 국방부 흉상은 놔둬도 되나? 정부가 잠수함 ‘홍범도함’ 함명 변경도 검토하자 해군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졸속으로 처리했다가 자칫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흉상을 이리저리 옮기는 소동이 벌어질 수 있다. 독립운동 최고의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의 홍 장군을 욕보이는 일이다.

 정부가 불쑥 일을 진행해 혼선과 갈등을 빚은 게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그랬고, 주 52시간제 개편, 만 5세 입학, 서울~양평고속도로 백지화,  최근 의경 신설까지 충분한 공감대 없이 추진했다가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중요한 현안도 많은데, 굳이 지금 이 일로 분란을?’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정부 내엔 ‘옳은 일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하다. 옳더라도 서두르면 탈이 난다. 국민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예전에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언론에 흘려 반응을 보고, 여론이 좋지 않으면 슬그머니 접기도 했다. 공청회라도 열어 군불을 때기도 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때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척결처럼 전격 단행한 개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국민 의견을 다지고 다져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킬러 문항 폐지나 흉상 이전이 금융실명제처럼 밀어붙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여론조사를 보면 국정 수행이 ‘일방적·독단적’이라는 응답이 5% 이상 나온다. 지난달 말 한국리서치 등의 조사에선 21%에 달했다. 충분한 소통 없이 추진하는 게 많은 탓이다. 정부가 열심히 하고도 점수를 못 따는 이유다. 정부가 느닷없이 발표하고, 국민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작은 싸움으로 힘 빼지 말고 큰일에 집중했으면 한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규제 개혁과 3대 개혁(노동·교육·연금) 같은 진짜 큰 현안은 제대로 손도 안 댔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