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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홍범도와 김명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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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중앙SUNDAY 편집국장

예영준 중앙SUNDAY 편집국장

그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한 뒤 상하이에서 지하활동을 하다 혁명 근거지인 옌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옌안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북한 정권에 참여하거나 인민군이 됐는데,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평양에 남지 않고 서울로 왔다. 훗날 북한 정권의 중추가 되는 김두봉, 최창익, 한빈, 박효삼, 무정 등과 함께 1945년 12월 평양에서 찍은 기념사진에 그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의 위상이 간단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 김명시 서훈 현 정부
홍범도 공산당 경력은 문제 삼아
자유시 참변 의혹도 명확지 않아

서울의 해방 공간에서 그는 좌익의 통일전선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소련을 추종하는 좌익의 찬탁과 민족주의 우익의 반탁으로 나라가 둘로 쪼개져 있던 1947년 그는 서울에 온 소련군 스티코프 중장에게 여맹 대표로 꽃다발을 주고 환영행사를 주도했다. 그 이후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지하로 숨어들면서 행적이 묘연해졌다가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숨졌다. 만일 그가 6·25전쟁 때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어떤 행동을 했을지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1945년 12월 국군준비대 대원을 상대로 이런 연설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피 없이 아니됩니다. 주저하지 말고 나가 주시오. 동무들 뒤에는 우리 무정 동무와 김일성 동무, 그리고 김원봉 장군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종군했기 때문에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사실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좌익 활동 중 일본에 검거돼 복역한 사실도 확인된다. 그렇게 사후 추서로 탄생한 독립유공자의 이름은 김명시다. 팔로군 포병대장 무정, 훗날 6·25 때 북한군 2군단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던 그 무정의 휘하에서 ‘백마탄 여장군’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의 사망 사실을 전한 신문 기사에 ‘북로당 정치위원’ 직함이 적힌 게 서훈 심사의 마지막 관문이 됐는데, 정부는 다른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결격 사유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지난해 8월 윤석열 정부의 결정이다.

김명시에 대한 서훈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을 보면서 공산 혁명가 김명시에게 훈장을 준 바로 그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의아한 느낌이 들어 얘기를 꺼낸 것이다. 국무총리까지 나서 공산당 입당 경력을 문제삼았는데, 공산당 이력으로만 따지자면 홍범도는 직업혁명가 김명시에 비할 바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서훈을 받고 이명박 정부가 8·15 행사에 후손을 초청한 독립유공자 중에 장지락이란 분이 있다. 님 웨일스의 기록문학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본명이 장지락이다. 그는 광저우 폭동 등 무장투쟁을 펼친 순정(純正) 공산주의자였다. 사회주의 계열에 서훈의 문호를 넓힌 건 김영삼 정부 때다. 좁은 이념의 틀을 깨고 공적은 공적대로 인정함으로써 보다 성숙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지향하자는 취지에서였을 것이다.

만일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자유시 참변 의혹이 사실이라면 홍범도의 흉상은 이전이 아니라 철거돼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청산리에서 함께 싸웠고 그 후 러시아행이란 같은 경로를 선택했던 철기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엔 이렇게 적혀 있다. “후일 홍범도씨는 러시아 이만시로 군대가 넘어가자 러시아에서 일크스크(이르쿠츠크)파의 공산당원이 된 사람들의 권유를 들어 공산당원이 됐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할 일도 없었고 이름만 빌려준 셈이 됐다.”

이 짧은 표현으로 논란을 종결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철기의 회고록에 무게를 둘 이유는 충분하다. 만일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을 도륙한 게 사실이라면 이만시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철기가 몰랐을 리 없고, 타인에 대한 평가가 결코 후하다고는 할 수 없는 회고록에 그런 악행을 쏙 빼고 적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