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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승욱의 시시각각

이재명 블랙홀에 빠진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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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디렉터

서승욱 정치디렉터

 입사 2년차 시절이던 1997년 12월 4일자 중앙일보 지면은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 협상 타결 소식을 전했다. 이 중 '5가지 대죄(大罪), 재경원 기자의 고해(告解)'란 제목이 달린 5면의 취재일기(기자칼럼)가 사내외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 굴욕적인 협상 과정을 지켜본 재정경제원(기획재정부 전신) 담당 기자가 국가적 대위기 앞에 선 언론인의 자괴감을 절절히 풀어냈다. ①1년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선진국이 됐다는 정부의 허황된 선전을 여과없이 전한 환상유포죄 ②정부의 발표를 검증 없이 전한 단순중계죄 ③하루하루 바닥나고 있는 외환보유액의 현실을 무시한 진상외면죄 ④반대와 비판에만 열중했던 대안부재죄 ⑤나라 경제가 무너질 가능성을 관찰하지 못한 관찰소홀죄가 '5가지 대죄'였다. 당시 정치부의 다혈질 선배가 "정치부 기자들도 대죄를 고백하자"고 열을 낼 만큼 기사의 반향이 컸다.

지난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선 외교·통일·안보분야 대정부질문이 진행됐다. [뉴스1]

지난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선 외교·통일·안보분야 대정부질문이 진행됐다. [뉴스1]

26년 전의 칼럼을 다시 떠올린 건 최근 우리 정치가 직면한 대위기 때문이다. 당시의 재경원 출입 기자처럼 정치부 기자로서의 자책감이 매일 쌓이고 또 쌓인다. 특히 지난주 나흘 간의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내내 펼쳐진 황당한 광경이 눈과 뼈를 때렸다. 야당 의원들의 수준 떨어지는 질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야유하는 야당 의석을 향해 "야구장에 오셨나"라고 대놓고 폄훼하는 국무위원의 처신 역시 눈을 의심케 했다. 최악 야당과 최악 국무위원들의 격돌은 지하 10층까지 추락한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을 요약했다. '정치부 기자의 5가지 대죄를 칼럼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승리보다 생존에 목숨 거는 야당
"이재명만 이기자"에 여당도 추락
정치 하향평준화 부른 몹쓸 구조

우리 정치는 어쩌다 이 모양이 됐을까. 거슬러 올라가면 박근혜 정권의 비극적인 탄핵 엔딩, 문재인 정권의 '적폐 청산' 광풍과 폭주가 배경에 있다. 우리 정치의 숙명적 아킬레스건인 진영 간 대결과 반목이 더 노골화됐다. 지난 대선 이후로만 범위를 좁히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조기 정계 복귀가 결정적이었다. 사법리스크 투성이의 전직 대선후보가 대선 패배 두 달여 만에 야당 강세지역(인천 계양을)의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 곧바로 야당 대표에 등극했다. 이는 정치 상실의 방아쇠였다. 국회는 그의 생존과 방탄을 위한 염치없는 상설 무대로 전락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켜본 대로 극단적 대립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재명 민주당'의 목표는 총선 승리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 대표는 얼마전 TJB 대전방송 인터뷰에서 "78%란 역사에 없는 압도적 지지로 대표가 됐고, 지금도 그 지지는 더 강화된다. 대표 사퇴는 여당이 바라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버티면 민주당 지지율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총선 전망도 암울해진다. 하지만 민주당이야 어떻게 되든 당 내부의 '친이재명 농도'가 짙어지고, 내부 패권만 유지하면 그만이라는 게 '78% 운운' 발언의 요체다. 승리가 아닌 패거리의 생존, "이재명을 구하자"며 길길이 뛰는 친명계 의원들과 개딸들의 목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부·여당의 수준도 덩달아 추락하고 있다. 용산만 바라보는 식물 여당, 이념 제일주의라는 난데없는 구호와 홍범도 논란, 전사가 된 듯 입법부와 싸워대는 국무위원들의 돈키호테식 처신 역시 '이재명 블랙홀'의 소산이다. 만약 '이재명의 민주당' 이 아니라 상식적인 야당과 경쟁하는 처지였다면 정부와 여당이 감히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아무리 못해도 '이재명의 민주당'만 이기면 되는 이 한심하고 몹쓸 구조는 한국 정치의 하향평준화를 낳는 주범이자 최악의 카르텔이다. 26년 전 칼럼에서 선배 기자가 열거했던 ①환상유포죄 ②단순중계죄 ③진상외면죄 ④대안부재죄 ⑤관찰소홀죄가 정말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쁜 정치 때문에 이 나라가 쪽박을 차지 않도록 눈을 부릅떠야 한다는 압박이 어깨를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