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어 다가오지 않는 일본 외교
일본 불안, 한국 불만 충돌 가능성
양국 국민 공동의 모티베이션 찾자
#1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동네 일본인 치과의사가 지난주 병원을 찾은 내게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 놀랐다.
"역시 국력이에요, 국력. 한국 대단해요."
뭔 소리인가 물으니 여름휴가를 유럽으로 다녀왔는데 가는 나라마다 한국, 한국 하더란다.
회사 근처 단골 이발소의 40대 주인장은 올해 들어 "난 윤석열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경이란다.
일본 최대 유통회사인 이온은 최근 수퍼마다 한식 판매대를 따로 큼지막이 마련했다.
도쿄도시가스의 최근 광고 영상은 한국을 동경하는 모녀가 한글을 배우고 한국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았다.
한·일관계가 안 좋던 시기에 일본 백화점에서 한국 소주가 진열대에서 사라지고, TV에선 한국의 흔적이 지워졌던 시기를 기억하는 입장에서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변화다.
#2 윤미향 의원의 조총련 행사 참석은 솔직히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 그런 성향의 인물이었다.
정작 나의 관심은 지난 1일 도쿄에서 열린 '제100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의 참석자 면면이었다.
하토야마 전 총리, 야마구치 공명당 대표, 다케다(일한의원연맹 간사장) 자민당 의원…. 쟁쟁한 여야 정치인이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본인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올 사람들이 왔다. 단골손님들이다.
우리가 공들였던 스가 전 총리(일한의원연맹 회장), 아소 전 총리(자민당 부총재) 등 거물·핵심 인사들은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 또한 조화라도 보내줄 걸 기대했지만 '역시'였다. 냉정했다.
#3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해법을 발표한 지 반년. 명암은 엇갈린다.
한국이란 말만 들어도 인상 쓰던 일본 국민들은 한국에 환호한다.
그러나 일 정부는 여전히 일정 선을 넘지 않는다.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를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기에 추도식장에도 오지 않는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반년 전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 찼다. (나머지 절반은) 일본의 호응에 따라 채워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 관료들은 나머지 절반을 채울 생각이 없다.
'기브 앤드 테이크' '±0 외교'는 머릿속에 없다.
왜 그럴까. 뿌리 깊은 '불안' 때문이다.
내년 총선이 됐건, 다음 정부가 됐건 상황 변화에 따라 한국이 돌변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가 그러니 재계, 학계도 여전히 '관망 중'이다.
문제는 그럴수록 한국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군함도의 유네스코 권고 무시 등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폭탄주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휘발성 강한 변수들도 속속 대기 중이다. 폭발은 시간문제다.
#4 이럴 때 절실한 건 공동의 '모티베이션'(동기부여)이다.
한·일 간에 정치가 다시 티격태격해도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양국 공통의 동력, 목표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2030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제안해 본다. '어게인 2002'이다.
내년 하반기에 개최지를 정하게 되는데,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맘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사실 양국 정부, 국민 모두가 상대방을 가장 가깝고 친밀하게 느꼈던 시기도 2002년 공동 월드컵 때였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일 마이니치신문이 한국-스페인 8강전 전날 '일본의 1억 명이 응원하고 있어!'란 한글 제목을 뽑은 건 벅찬 감동이었다.
당시 이에 항의하는 일본 독자의 전화는 단 두 통뿐이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이전 서울에서 열렸던 프랑스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 응원단이 일본을 향해 '프랑스에 함께 가자!'는 영문 플래카드를 내건 데 대한 보답이었다.
그렇다. 양국에 지금 필요한 건 이런 것이다.
일 정부, 관료들은 못하는 '기브 앤드 테이크'를 일 국민은 할 수 있다.
유치에 실패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 과정에서의 양국 국민의 뜨거운 에너지, 폭넓은 공감대는 고리타분한 정치 갈등을 뒤덮고도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