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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13일 낮 우주기지 도착? 불가측성 가득한 북·러 회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러시아에 도착했지만,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는 '극동', '수일 내' 등 모호한 공식 발표만 나오고 있다. 통상의 정상외교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이다.

김정은의 방러 일정은 이날 오전 북·러 접경지역인 연해주 하산역에서 열린 환영식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상회담 일자나 장소 등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김정은이 타고 있는 전용열차 '태양호'의 움직임에 따라 목적지를 추정하는 식의 언론보도가 이어진 이유다.

12일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EF)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모습. AP, 연합뉴스

12일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EF)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모습. AP, 연합뉴스

외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김정은과 푸틴의 일대일 정상회담이 "동방경제포럼(EEF) 행사 이후 수일 내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회담 장소에 대해서도 "극동 지역"이라고만 했다. 러시아의 극동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 뿐 아니라 하바롭스크 등 광활한 지역을 모두 포괄해 칭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0일 오후 러시아 방문을 위해 전용열차로 평양을 출발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0일 오후 러시아 방문을 위해 전용열차로 평양을 출발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의 평양 출발 소식만 보도한 가운데 일본 교도통신은 이날 오전 러시아 당국자를 인용해 김정은이 전용 열차로 극동지역의 아무르주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리아노보스티 통신도 이날 오전 "김정은의 장갑 열차가 연해주 라즈돌나야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예상과 달리 블라디보스토크를 빗겨간 것이다.

현지의 소셜미디어(SNS)에는 "(우수리스크 인근에서) 김정은 기차와 매우 유사한 열차가 발견됐다. 직원들은 사람들에게 약 15분 동안 기다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승객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다"는 내용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이날 김정은의 전용 열차가 우수리스크에서 기관차 승무원을 교체한 뒤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따라 아무르주가 있는 북서쪽으로 출발했다고 전했다. 아무르주의 우글레고르스크에는 당초 뉴욕타임스(NYT)가 김정은 일행이 방문할 수 있다고 거론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가 있다.

12일(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연해주 우수리스크역 근처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탄 전용열차가 북쪽 방향으로 지나는 모습. 연합뉴스

12일(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연해주 우수리스크역 근처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탄 전용열차가 북쪽 방향으로 지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다 이날 늦은 오후 푸틴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EEF에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고 직접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푸틴은 이런 '깜짝 발표'를 하면서도 김정은과의 만남 여부에 대해선 답하지 않았다. 푸틴의 발언과 김정은의 동선을 종합하면 두 정상이 보스토니치 우주기지에서 만날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일본 교도통신이 러시아 당국 소식통을 인용해 13일 우주기지에서 김정은과 푸틴이 회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소식통은 두 정상이 회담 뒤 인근 하바롭스크주 산업도시 콤소몰스크나아무레에 있는 수호이 전투기 생산 공장도 방문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김정은의 전용열차는 장갑이 장착돼 최고 속도가 시속 60km정도다. 철로 사정 때문에 실제 속도는 더 낮춰야 한다. 김정은의 열차가 이날 오후 1시경 우수리스크역 인근을 지난 것을 감안하면 680km 떨어진 하바롭스크에 도착하는 시간은 13일 자정 또는 새벽이 될 전망이다. 여기서 782km 떨어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13일 정오 무렵으로 예상된다. 평양에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까지의 총거리는 2300㎞에 달한다.

푸틴 대통령이 13일 EEF 일정을 마친 뒤 전용기를 탈 경우 김정은과 거의 비슷한 시간에 우주기지에 도착할 수 있다. 일각에선 푸틴 대통령이 먼저 현지에 도착해 김정은을 맞이하고 곧장 정상회담 일정을 소화하는 모양을 연출하기 위해 김정은의 열차가 의도적으로 속도를 더 늦추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처럼 회담의 당사국인 북한과 러시아는 아무런 공식 발표를 하지 않은 채 언론의 중계식 보도로 퍼즐이 맞춰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에는 국제사회에서 '불량국가'로 낙인찍힌 두 지도자의 고민이 묻어난다.또 여기엔 정보 판단을 근거로 사전에 김정은의 동선과 방문지, 일정을 모두 공개한 미국의 인지전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돌입한 이후 정보 사안을 선제적으로 공개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판단과 행동을 수정토록 하는 전략을 견지해왔다.

러시아의 달 탐사선인 루나-25가 지난달 11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발사되는 모습. AFP, 연합뉴스

러시아의 달 탐사선인 루나-25가 지난달 11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발사되는 모습. AFP, 연합뉴스

미국의 눈과 귀를 피해 허를 찌르려다 보니 불가측성에 방점을 둔 정상회담 진행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장소가 갖는 의미도 크다. 보스토치니 기지는 러시아 당국이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2012년부터 새로 건설한 첨단 시설이다. 지난 5월과 8월 두 차례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실패하고도 오는 10월에 또 재발사를 예고할 정도로 조바심을 내비치고 있는 김정은 입장에선 북·러 양국의 군사 협력을 상징적으로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곳이다. 이는 김정은이 원하는 위성 기술이 정상회담에서 '매물'로 나올 것이란 암시로도 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4월에도 '형제국'으로 불리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과의 만남을 이곳에서 가진 바 있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러가 상호 전략적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상황에 맞춰 거래를 진행하고 있다"면서도 "양국은 이번 군사거래가 미칠 후과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는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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