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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덕 쌓아야 본다? 지리산 일출 명당은 천왕봉 아닌 이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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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석의 Wild Korea⑥ 지리산 성백 종주 

돼지령 근처에서 본 천왕봉의 여명. 마치 붉은 오로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돼지령 근처에서 본 천왕봉의 여명. 마치 붉은 오로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지리산은 설악산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산이다. 특히 지리산 주 능선을 걸으며 1500m가 넘는 봉우리를 숱하게 만나는 ‘종주’ 코스는 산꾼의 로망이다.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 성백종주(성삼재~백무동)를 대표 코스로 꼽는다. 성백종주가 짧고 수월한 편이어서 1박 2일 코스로 도전할 만하다.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고 무더웠다. 그러나 날씨는 절기를 거스를 수 없는 법. 지난달 말, 여름 끝자락을 밟고 지리산 종주를 다녀왔다.

새벽 3시 성삼재 출발

사람들은 지리산에 얽힌 추억 때문에 다시 산을 찾곤 한다. 대개 고생한 추억이지만, 풋풋한 젊은 날이 담겨 있어 소중하다. 필자도 진한 추억이 있다. 학창 시절 쌀과 고추장만 들고 종주에 도전했다. 대피소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아저씨들과 어울려 고기반찬을 배 터지게 잘 먹었다. 천왕봉(1915m) 넘어 대원사로 내려오다가 길을 잃고 난생처음 산에서 비박하기도 했다. 그때의 따뜻하고 고생스러운 기억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함양지리산고속은 지리산 등산로 입구 구석구석을 운행한다. 갈 때는 성삼재, 나올 때는 백무동을 이용한다.

함양지리산고속은 지리산 등산로 입구 구석구석을 운행한다. 갈 때는 성삼재, 나올 때는 백무동을 이용한다.

지리산 종주는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천왕봉에 올라 종주의 대미를 장식하고 하산하는 구조가 드라마틱하다. 세석대피소에서 하룻밤 묵고 백무동으로 빠지는 1박 2일 일정으로 ‘성백 종주’에 도전했다. 새벽 3시, 딸각! 성삼재 등산로 입구에서 헤드 랜턴을 켰다. 순간 견고한 어둠이 허물어지면서 빛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으로 커다란 배낭을 멘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한동안 땅만 보고 가다가 랜턴을 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무수한 별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야간산행에서 별 감상하는 묘미를 놓칠 수 없다.

새벽 4시쯤 노고단 삼거리에 도착해 노고단 위에 뜬 무수한 별을 감상했다. 꼭지처럼 보이는 게 노고단 정상 돌탑이다.

새벽 4시쯤 노고단 삼거리에 도착해 노고단 위에 뜬 무수한 별을 감상했다. 꼭지처럼 보이는 게 노고단 정상 돌탑이다.

한 여성이 내 앞을 지나쳐 간다. 사뿐사뿐 가볍게 리듬을 타고 걷는 게 꼭 나비가 날아가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이 걸었으면 저런 걸음을 얻었을까. 나는 감탄하며 나비를 잡으려는 사람처럼 허둥대며 따라갔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시쯤 노고단 삼거리에 닿았다. 여기서 노고단 가는 탐방로는 오전 5시에 열린다. 노고단을 생략하고 본격적으로 지리산 능선을 밟는다. 노고단 삼거리에서 천왕봉까지 거리는 무려 25.5㎞다.

울퉁불퉁한 능선이 부드러워지면 돼지령에 다 온 것이다. 돼지령 근처에서 운 좋게 천왕봉 쪽에서 쏟아지는 여명을 지켜봤다. 붉은 오로라 같은 빛이 천왕봉 일대를 물들였다. 노루목에서 반야봉 오르는 길이 갈린다. 반야봉(1732m)에 오르는 건 포기했다. 반야봉에 들르면 1시간을 더 잡아야 한다.

삼도봉 조형물을 촬영하는 탐방객. 삼도봉은 전남, 전북, 경남이 만나는 봉우리다.

삼도봉 조형물을 촬영하는 탐방객. 삼도봉은 전남, 전북, 경남이 만나는 봉우리다.

삼도봉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 돌린다. 이 봉우리에서 전남, 전북, 경남이 만났다니 신기하다. 화개재까지 곤두박질했다가 다시 토끼봉을 오르는 가파른 길이 첫 번째 고비다. 고비를 넘기면 연하천대피소에서 여유 있게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대피소 매점에서 즉석밥을 사 즉석 짜장에 비벼 김치와 함께 먹었다. 꿀맛이었다.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흐르는 연하천대피소는 하룻밤 묵어가고 싶은 숙소다.

연하천대피소에서 햇반을 구매해 즉석 짜장과 함께 먹었다. 산에서 먹는 음식은 꿀맛이다.

연하천대피소에서 햇반을 구매해 즉석 짜장과 함께 먹었다. 산에서 먹는 음식은 꿀맛이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는 2시간 거리다. 커다란 바위가 많은 형제봉을 넘으면 벽소령대피소가 나온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약 3시간 거리로 첫날의 두 번째 고비다. 먼 길을 걸었기에 배낭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진다. 덕평봉과 연신봉을 넘으며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수백 번 곱씹다가 오후 6시 30분 어둑어둑해질 무렵, 세석대피소에 닿았다. 비슷하게 도착한 아저씨와 함께 밥 먹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세석대피소의 숙박 공간. 세석대피소 3호실 1층은 독립된 공간을 혼자 쓴다. 세석대피소는 지리산 대피소 중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

세석대피소의 숙박 공간. 세석대피소 3호실 1층은 독립된 공간을 혼자 쓴다. 세석대피소는 지리산 대피소 중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

촛대봉에서 만나는 감동적인 일출

촛대봉에서 바라본 일출 .  지리산 능선이 구름에 젖어 꿈을 꾸는 듯 몽롱하다 .  가장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일출 . 지리산 능선이 구름에 젖어 꿈을 꾸는 듯 몽롱하다 . 가장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다음 날 오전 5시 30분. 서둘러 대피소를 출발했다. 촛대봉(1703m)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천왕봉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알려졌다. 그만큼 보기 힘들고 멋지다는 뜻이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는 촛대봉 일출이 한 수 위다. 천왕봉과 함께 어우러진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촛대봉에 도착하자 해가 막 두꺼운 구름에서 나와 천왕봉 일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지리산 능선은 구름에 젖어 꿈을 꾸는 듯 몽롱하다. 산아래 마을은 아직 구름 속에서 잠들어 있다.

천왕봉의 베이스캠프 격인 장터목대피소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백무동 하산인 경우는 배낭을 여기에 내려놓고 정상을 찍고 온다.

천왕봉의 베이스캠프 격인 장터목대피소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백무동 하산인 경우는 배낭을 여기에 내려놓고 정상을 찍고 온다.

감동적인 일출을 감상하고 다시 능선을 잇는다. 장터목대피소까지는 2시간 거리.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천왕봉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돌이 많아 제법 험한 길을 조심조심 걸어 천왕봉 베이스 캠프 격인 장터목대피소에 닿았다. 백무동 하산을 선택했기에 배낭을 내려놓고 천왕봉에 오른다. 가방 보관함은 없지만 산꾼 대부분이 이렇게 한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이 사라지자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요즘 유행인 천왕봉 인증 사진 . 마치 비석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이게 찍는다.

요즘 유행인 천왕봉 인증 사진 . 마치 비석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이게 찍는다.

제석봉 일대는 고사목과 야생화가 어우러져서 장관이다. 특히 홍자색 산오이풀이 군락을 이룬다. 7~8월에 피는 산오이풀은 마지막 절정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산오이풀 사이에서 가을 식물인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다. 앞으로 능선은 가을꽃과 풀벌레 소리로 가득하리라.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출발했던 노고단 일대가 아스라이 보인다. 저 먼 곳부터 걸어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지리산 능선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 등 가을꽃이 만발했다.

지리산 능선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 등 가을꽃이 만발했다.

바위 사이로 길이 난 통천문을 지나면 천왕봉이 지척이다. 고사목 지대를 통과하면 대망의 천왕봉에 닿는다. 오전 10시. 기어코 두 발로 천왕봉을 밟았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참고 꾸준히 걸었다. 내가 기특하고 대견하다. 긴 줄을 기다려 천왕봉 비석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발아래 놓인 세상을 지그시 굽어보고 산에서 내려온다. 내 안에 지리산이 들어온 느낌이 든다. 뭔가 따뜻하고 힘찬 기운이 가득하다.

여행정보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접근성이 좋고 고도가 높은 성삼재(1102m)를 출발점으로 삼는 걸 추천한다. 첫날 성삼재~세석대피소 약 23㎞ 10시간, 이튿날 세석대피소~천왕봉~백무동 약 13㎞ 6시간쯤 걸렸다. 세석대피소에 잔 덕분에 다음 날, 촛대봉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자면 첫날이 덜 힘들지만 다음날이 부담된다. 대피소는 국립공원공단 예약통합시스템에서 예약한다. 짐을 가볍게 꾸리는 게 중요하다. 식사는 대피소에서 파는 즉석밥을 사고, 식수는 대피소와 능선에 있는 샘에서 구하면 된다. 발목까지 오는 중등산화가 적당하고, 스틱은 필수다. 교통은 자가용보다 ‘함양지리산고속버스’가 편리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성삼재 가는 버스가 하루 한 번, 오후 11시 출발한다. 백무동에서 동서울터미널 가는 버스는 하루 8회 운항.

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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