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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엘긴 마블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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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최근 영국박물관(브리티시 뮤지엄)에서 소장품 2000여 점이 오랜 기간에 걸쳐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다. 더욱 놀라운 건 주요 용의자가 박물관에서 30년간 일한 수석 큐레이터라는 점이다. 용의자는 지난 20년에 걸쳐 기록이 부실한 소장품을 빼돌려 인터넷 등 여러 통로로 꾸준히 팔았다고 한다. 세계 최정상급 박물관 명성답지 않게 유물관리 및 보안시스템이 부실한 사실도 쇼킹하지만, 그동안 도난 의심 경고 등을 무시하고 비슷한 사건을 묻어두는 형식의 경영 방식도 문제가 되고 있다.

아메리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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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박물관의 신뢰도가 떨어졌다. 그 결과 지난 40여 년간 그리스와 영국의 갈등을 일으킨 이른바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엘긴 마블스는 현재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파르테논 신전 장식 조각물을 일컫는다. 19세기 초에 오토만 제국의 영국 대사로 있던 토마스 브루스(엘긴 경)가 뜯어간 조각물의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해 온 그리스 정부가 이번 영국박물관 도난 스캔들을 계기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영국 측은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 한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고 인류 공동의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문화국제주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 즉 제국주의적 문화재 침탈 행위를 옹호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엘긴 마블스를 돌려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대한 선례가 되는 일이기에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엘긴 마블스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고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이 모두 문을 닫아야 할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1970년 문화재 불법 거래 방지에 관한 유네스코 협약 이후로 불법적으로 획득된 소장들이 하나둘씩 본래 출토 국가로 반환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이는 극도로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현재 계속되는 불법 유물 거래의 총액은 전 세계적으로 무기 거래 못지않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