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사회는 천국일까, 지옥일까. 지난해 소설집 『저주토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47)의 신작 장편 소설 『고통에 관하여』(다산책방·사진)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중독성도, 부작용도 없는 완벽한 진통제 ‘NSTRA-14’가 등장한 이후 인류는 고통 없는 사회에 도달한다. 하지만 고통이 사라지자 인간은 고통을 갈망하게 되고, 급기야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신흥 종교 단체가 폭발적으로 세를 키운다. NSTRA-14를 만드는 제약 회사는 테러를 당하고, 교단 지도자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한 마디로 테러와 살인과 사이비 종교가 얽히고설킨 ‘매운맛’ SF 스릴러다. ‘복수와 저주의 작가’로 불리는 정보라를 지난 29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보라의 소설은 현실의 사건에 뿌리를 둔 것이 많다. 『저주토끼』는 2004년 쓰레기 만두 파동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이다. 『고통에 관하여』는 마약성 진통제 오남용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중독성이 강한 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렴 어때’ 하고 환자에게 그 약을 먹이는 현실을 접하고 분노하기에 앞서 어리둥절했어요. ‘어떻게 저럴 수 있지’하는 생각과 함께 그저 어리둥절한 상태가 됐죠.”
그가 환상문학과 SF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도 이런 현실과 맞닿아 있다. 정보라는 “미국의 옥시콘틴(마약성 진통제) 오남용 등 각종 사건을 마주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런 제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환상문학”이라고 했다. “때로는 현실이 상상보다 더 비현실적”이라면서다.
이어 그는 “SF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기 적합한 그릇”이라고 덧붙였다. “SF는 주인공이 외계인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잖아요. 그러니까 주류가 아닌 이들의 시선을 담아내기에도 적합하죠. 예를 들어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길러진 복제 인간의 문제를 다룰 때, SF라는 장르를 이용해 그 복제 인간의 시선에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정보라는 철도 민영화 반대 시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 등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되는 ‘데모 현장’에 나갔다고 한다. “글만 써서는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책을 많이 팔아서 문화 산업 활성화에 기여할 수는 있겠죠. 이건 굉장히 간접적이고 두루뭉술한 방식이거든요. 소설 쓰는 것과 데모하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움직임이라는 거예요.”
그의 차기작 역시 ‘현실 밀착형 SF’다. 아이들이 가정이 아닌 그룹홈에 모여 사는 사회를 그렸다. 부모가 있는 아이라도 그룹홈에서 거주하는 것이 ‘정상’이고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은 예외적인 사회다. “아이가 선택한다면 부모와 함께 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룹홈에서 살아가는 거죠. 아이가 다 자라서도 그룹홈에 머물고 싶으면 베이비시터가 돼야 합니다.”
정보라는 수많은 영아 살인 유기 사건을 접하며 “아이들이 가정에서 살지 않는 게 정상인 사회를 상상하게 됐다”고 했다. “핵가족·맞벌이가 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게 큰 부담이 됐고 양육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채 아이가 태어나면서 여러 문제가 생겼죠. 그런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입니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너무 얌전한 이야기”라는 지적에 정보라는 “그래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