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대선, 우리는 서로 싸우다 졌고 국민은 나를 원망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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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16〉

1987년 8월 6일 통일민주당(민주당)에 입당하기로 결정한 뒤 김영삼 총재(오른쪽)와 악수하고 있다. 이틀 뒤 민주당에 입당했으나 대선 후보를 두고 갈등을 벌이다 탈당했고, 11월 12일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중앙포토]

1987년 8월 6일 통일민주당(민주당)에 입당하기로 결정한 뒤 김영삼 총재(오른쪽)와 악수하고 있다. 이틀 뒤 민주당에 입당했으나 대선 후보를 두고 갈등을 벌이다 탈당했고, 11월 12일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중앙포토]

1987년은 우리 현대사에 ‘87년 체제’를 새겨 넣은 격동의 시간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갈구하는 시대적 물결은 새해 벽두에 터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월 14일)과 맞물려 정국을 긴박하게 몰아갔다.

당시 민주화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의미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방법의 변경은 88서울올림픽 개최 이후인 89년에 논의하자”며 직선제를 외면했다. 나, 김대중(DJ)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사면·복권되더라도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배수진을 치고 대치했다.

이런 와중에 ‘이민우 구상’이 돌출했다.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언론 자유 보장, 양심수 석방과 사면·복권 등 민주화 조치가 선행되면 전두환 정권이 선호하는 내각책임제를 수용할 수 있다고 불쑥 던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벌이던 나와 김영삼(YS)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의 뜻과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YS에게 신민당 총재 넘겨라”

그해 2월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나와 YS는 이민우 총재를 만나 최후통첩을 했다.

(김대중) “이 총재는 저와 김영삼 의장이 (정치 규제자로) 묶여 있는 동안 신민당을 대리로 맡은 것 아닙니까. 김 의장(YS)이 복권됐으니 주인(총재)을 찾아줘야 합니다. 김 의장에게 당권을 넘기십시오. 저와 김 의장은 라이벌이지만, 그래야 민주화 투쟁이 제대로 힘을 발휘합니다.”

(이민우) “….”

이민우 총재는 버텼다. 3자 회동 후 그는 “당권은 몇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반발했다. YS 계열이었던 그는 YS를 총재에 추대할 뜻이 없었다. 결국 YS는 신민당을 버리고 통일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나는 YS가 직선제 등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 갈 적임자라고 보고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있던 4월 13일에 맞춰 ‘개헌 유보, 호헌(護憲)’ 조치를 발표했다. 선거인단 간선제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술책이었다. ‘대통령은 내 손으로 뽑자’며 개헌 기대에 부풀었던 국민은 크게 낙담했다.

“막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 도중 경찰에 의해 ‘닭장차’로 연행되고 있다. [중앙포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 도중 경찰에 의해 ‘닭장차’로 연행되고 있다. [중앙포토]

때마침 박종철 치사의 만행이 드러나면서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며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가 격해졌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5·18 7주기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며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던 정권의 음모를 폭로했다.

연세대 이한열군이 6월 9일 최루탄에 피격당하고, ‘고문 살인 은폐’를 규탄하며 ‘호헌 철폐’를 주장하는 6월 항쟁이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터졌다. 무도한 권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나는 “악당들이 이 땅을 짓밟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막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6월 항쟁을 보면서 민주화를 의심치 않았다.

민주화는 대학생과 정치인만으론 되지 않는다. ‘넥타이 부대’와 가게 주인들 등 시민이 일어서야 한다. 6월 항쟁에는 중산층이 한복판에서 움직였다.

내가 알기로,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을 선언한 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중산층의 저항을 목도한 미국은 비상계엄에 의한 전두환 정권의 물리적 진압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며 ‘6·29 선언’이란 항복을 하게 된 배경이다.

‘경상도·전라도 정·부통령제’ 구상

1987년 12월 13일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 13대 대선 평화 민주당 후보로 유세를 벌이며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화답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87년 12월 13일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 13대 대선 평화 민주당 후보로 유세를 벌이며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화답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6월 항쟁 덕분에 사면·복권된 나는 7년 만에 정치 무대로 복귀했다. 80년 사형선고를 받은 뒤 20년으로 감형됐다가 감옥과 병원을 전전하다 미국으로 쫓겨나 망명객으로 떠돌았다.

2년여 만에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귀국했지만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하는 험난한 세월을 겪었다.

직선제 관철이 최대 현안이었다. 6월 항쟁에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에게 전두환 집권세력을 쫓아낼 힘은 아직 부족했다. 투쟁도 우리의 역량을 감안하면서 해야 한다. 저들이 역습할 수 있는 구실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야권의 대통령 중임제와 정·부통령제 제안은 그렇게 나왔다. 여당 민정당은 대통령 단임제를 전두환의 업적으로 떠받들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중임제는 안 된다”고 막았다.

민정당은 정·부통령제도 거부했다. 야권이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각각 대통령·부통령을 나눠 맡을 경우 선거에서 불리하다고 예단했다. 우여곡절 끝에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뼈대로 한 헌법이 10월 29일 공포됐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87년 체제’의 시작이었다.

‘대통령 후보-민주당 당수’ 역할 분담론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80년 서울의 봄’을 빼앗긴 실수를 교훈 삼아 DJ·YS의 후보 단일화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었다. 나와 YS는 “80년대와 같이 우매한 일을 하여 국민이 걱정하게 하지 않도록 결코 표결로 대결 없이 단합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솔직히 나는 YS 측과 합의가 잘 되면 대선에 안 나가려 했다. 유력 언론사 사장이 우리에게 역할 분담을 제안했다.

“두 분(DJ·YS)이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 당수를 하나씩 나눠 하시라.”

나는 대통령 후보가 되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 하겠다”며  당수를 맡는 방안을 수용했다.

YS 측은 거부했다. 후보와 당수를 독식하고자 했다. 우리 쪽(동교동계)에 대놓고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가 되면 공산당이라며 군부가 쿠데타를 한다. 그래서 양보할 수 없다”는 ‘군부 불신론’까지 들먹였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나는 몹시 화를 냈다. 그런 못된 소리가 들려오면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는데 군이 무서워 자유롭게 후보를 못 낸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대통령 후보와 당수 중 하나도 양보하지 않겠다면 당을 같이 하자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민주화를 위해 다 같이 고생했지만, 내가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 가는 등 더 고생했다. 그런데 ‘당수 자리조차 내주지 않겠다’고 하면 나를 따라온 사람들은 뭐가 되겠는가. 그런 식의 정치에 누가 승복하겠는가?”

단일화 협상 결렬, 독자 출마

대선 두 달쯤 앞두고 YS가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전당대회에서 경선할 것을 제의했다. 나는 공정한 경선을 위해 200여 개 지구당 중 미창당된 30여 곳은 우리 쪽에 달라고 했다. 그것도 거절당했다. 단일화 협상은 깨졌다.

나와 나를 지지하는 의원들은 민주당에서 집단 탈당하고, 11월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됐다. 전국 곳곳에서 벌인 유세에 인파가 몰려왔다.

절정은 12월 16일 대선 투표일을 사흘 앞둔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 펼쳐졌다. 지지자들은 춤추고 만세를 외치며 서울시청 앞까지 행진했다. 그렇게 열광적인 경험은 처음이었다.

억울한 ‘4자 필승론’ 누명

대선 하루 전인 15일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되면서 나의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었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중계했다.

대선이 안보 국면으로 흘러갔다. 나는 또다시 색깔론의 피해자가 됐고, 군 출신의 노태우 후보가 최대 수혜자였다.

12·16 대선에서 3위에 그쳤다. 노태우 36%,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 금권·관권을 동원한 정권의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나 또는 YS가 대통령이 되고, 노태우는 안 되는 선거였다.

여당은 부정선거를 은폐하기 위해 나에게 ‘4자 필승론’을 뒤집어씌웠다(※대선에 4명이 출마하면 영남표는 노태우와 김영삼으로 갈라지고, 김종필은 충청표를 가져가지만, 김대중은 충청표보다 더 많은 호남표를 가져가 당선에 유리하다는 논리).

다른 야당과 언론이 동조했다. ‘4자 필승론’과 나의 대권 욕심 탓에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고 비난을 가했다.

국민은 일이 잘 안 됐을 때 누군가에게 원망하고 싶어 한다. 내가 원망받을 만한 일을 하긴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둘(DJ·YS)이 싸웠고, 국민은 나에게 더 가혹했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8549)을 보실 수 있습니다.

17회 〈문익환·서경원 방북과 공안 한파〉가 이어집니다.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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