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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자결연 집팔아 옥바라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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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보통 시민들에게 교도소란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다.
우뚝 솟은 망루와 잿빛 높은 담에서 왠지 위압감을 느끼고 담 너머에 몰려다닐 푸른 죄수복의 「빡빡 머리」들을 연상할라치면 섬뜩한 기분마지 들게 마련이다.
재소자들도 똑같은 인간이며 얼룩진 과거를 씻고 밝은 세상에서 떳떳하고 행복하게 살고픈 소망을 오히려 더 뜨겁게 간직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선뜻 도움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이는 참으로 드물다.
정팔기 할머니(74·세례명 안나·인천시부평3동)는 그런 드문 사람 가운데도 드문 사람이다. 환갑을 넘긴 노년에 우연히 접하게된 교도소 재소자들의 삶에 남다른 느낌을 받고 그들을 사랑으로 뒷바라지해 새사람으로 이끌기에 여생을 바치고 있는 별난 인생이다.
눈보라와 복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시사철을 하루가 멀다하며 떡·과일 등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교도소를 찾는 할머니가 눈물 거워 재소자들은 정 할머니를 보면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든다.

<수녀의 당부가 인연>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빚어진 음식을 들고는 「엄마의 말씀」을 듣는다. 『사회에 나가 또 나쁜 짓을 한다면 여러분들의 오늘이 고생은 물거품이 됩니다. 짧은 인생을 후회로만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비온 뒤 땅이 굳는 법입니다.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마음을 닦으면 새 삶을 얻을 겁니다.』
정씨가 교도소 재소자들과 첫 인연을 갖게 된 것은 78년. 천주교에 입문한 뒤 그해 8윌 한 신자의 강으로 인천소년교도소를 찾게된 정 할머니는 교화활동을 하던 수녀로부터 『재소자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간곡한 호소를 들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빡빡 깍은 머리가 섬뜩했고 그 눈망울들이 그저 불량스럽게만 보여 무서움으로 떨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하루 그 애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지은 죄가 어떻게 그들 혼자만의 죄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량스럽게만 느껴졌던 눈빛도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의 모습대로 선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나중엔 그들이 보고 싶어서 내가 「재소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교도소 옆에 방 얻어>
재소자들을 보지 않으면 걱정스러워 견딜 수 없게된 할머니는 경북대교수인 외아들(55) 가족과 아예 떨어져 살기로 하고 3년째 되던 80년 대지 50여평의 서울방배동 집을 팔아 인천소년교도소 옆에 단칸 전세방을 얻었고 집 판 돈으로 본격적인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18세 때 결혼해 21세 때 남편과 사별, 갓 태어난 5대 독자를 교수로 키운 할머니는 아들이 한사코 『편히 모시고 싶다』고 극구 만류했으나 『아마 내가 병에 걸린 모양』이라며 뿌리쳤다.
인천에서 모자 결연을 맺은 소년 장기수들이 성년이 돼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면 이들이 가는 곳을 찾아가 뒷바라지하는 정 할머니는 자연 그곳에서 또 다른 「아들」들을 맞게됐다. 서울영등포·수원·의정부·홍성교도소까지 활동영역이 넓어졌다.

<재범자는 단 한 명뿐>
『교도소에 있는 아이들에게 약속한 게 있지요. 너희들이 사회에 나가 착하게 살수 있도록 자리잡게 해주마고.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르는데 한 명에게라도 더 이 약속을 지켜야지요.』
올해까지 13년째 정 할머니가 옥바라지해온 「아들」들은 일일이 헤아리지 못할 정도다.
이들 가운데 특히 할머니가 주관해온 레지오 모임(천주교신자인 재소자들의 집회)에 참여, 교화를 받고 출소한 재소자만도 1천5백여명에 이른다. 그중 다시 범행을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정씨는 살인범 등 흉악범과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재소자들과·모자 결연을 하고 이들이 출소한 뒤 숙식제공과 취업알선·결혼주선 등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도록 힘써왔다. 88년l월 출소한 혈혈단신의 송창진씨(27)의 경우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 보살피기도 했다.
모자 결연 재소자는 현재 영등포교도소에 5명, 인천 2명, 홍성 3명, 의정부 2명, 수원교도소 1명 등 13명이 복역중이다.

<나환자 찾아 봉사도>
정 할머니의 사랑은 재소자 교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매주 한번 부평에 있는 나환자촌을 찾아 숨진 병자의 입관과 염습을 도맡다 시피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에이즈로 숨진30대 무연고 여성의 입관 등 장례를 혼자 맡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이 신명이 나서 재소자들과 나환자들을 돌보아온 할머니를 슬프게 하는 일도 종종 있다.
턱없이 치솟는 전세 값과 「전과자」들이 할머니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꺼리는 주위의 눈총,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끝내 새사람이 못되고 마는 출소자들이 그것이다.
올 봄 3백만원이던 전세 값을 5백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해 같은 값의 방을 구하기 위해 무척 애를 먹었던 정 할머니는 벌써부터 내년 집세걱정이 태산같다. 며느리가 보내주는 생활비까지 합쳐 한달 수입은 60만원 남짓. 한 푼이라도 아껴 「아들」들을 위해 써야하는 안타까움을 누가 알랴.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신의 「아들」들을 주변에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것도 신경에 거슬린다.
이럴 때면 교도소로 달려가「아들」들의 얼굴을 다시 보거나 전국에 흩어져 사는 「아들」들이 보낸 편지를 다시 읽으며 뒤숭숭한 마음을 가다듬는다.
『교도소가 범죄대학이 아니라 사랑대학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랑의 값진 뜻을 깨우쳐 새 사람이 되도록 변화를 준 어머니의 희생과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등포교도소 주○○. 뜨거운 사랑은 차가운 교도소 담장 안에서도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글 이상일·사진 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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