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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랑GO] 160여 년 732만 재외동포 발자취로 한눈에 보는 한국 근현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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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심심해~”를 외치며 꽁무니를 따라다닌다고요? 일기쓰기 숙제하는데 ‘마트에 다녀왔다’만 쓴다고요? 무한고민하는 대한민국 부모님들을 위해 ‘소년중앙’이 준비했습니다. 이번 주말 아이랑 뭘할까, 고민은 ‘아이랑GO’에 맡겨주세요. 이번엔 재외동포 발자취에 어린 근현대사를 알아봐요.

인천광역시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는 160여 년에 이르는 재외동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인천광역시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는 160여 년에 이르는 재외동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맞물린 한인 이민의 역사  

외교부의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재외동포 수는 약 732만 명(2021년 기준)에 이른다. 대한민국(약 5156만)과 북한(약 2616만)의 인구가 7772만 명임을 고려하면 약 10%에 달하는 한국인이 해외에 사는 것. 놀라운 사실은 이들 대부분이 약 160여 년 동안 세계 각지에 자리 잡았다는 거다. 수백만 명의 한국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전 세계에 살게 된 걸까. 2008년 개관한 한국이민사박물관(인천광역시 중구)에서 미국·멕시코·러시아·중국·일본·독일 등 세계에 자리 잡은 한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재외동포재단법」에 따르면 재외동포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 국적과 관계없이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거주·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해외이주민, 체류자를 가리키는 재외국민, 우리 국적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한민족의 일원을 가리키는 외국국적동포로 나뉘는데, 재외국민보다 외국국적동포가 2배 가까이 많다. 외국의 시민권이나 국적을 가진 사람들도 재외동포에 포함된다.

우리 민족의 이민 역사는 18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등 정세가 불안했으며, 계속되는 가뭄으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농민·노동자들은 기근과 빈곤, 불안한 사회·정치 상황을 피해 중국(만주)·러시아(연해주)·미국(하와이)·멕시코 등으로 이주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먼저 중국·러시아 재외동포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1800년대 말 청나라가 만주 지역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주 및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면서, 조선인들은 땅이 비옥한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이주를 본격화 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국권을 강제로 빼앗긴 후에는 탄압을 피하려 만주·연해주로 이주해 일제의 감시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성을 지키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899~1905년 만주 북간도에 형성된 한인마을 명동촌이 대표적이다. 저항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는 명동학교가 세워져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독립전쟁 등 한국 독립군의 승리 뒤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은 우리 동포들의 조력이 있었다.

간도로 쫓겨가는 조선인들. 일제는 만주 황무지 개간을 위해 조선인을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국가기록원

간도로 쫓겨가는 조선인들. 일제는 만주 황무지 개간을 위해 조선인을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국가기록원

일본은 만주를 중국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을 세웠다. 만주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조선인을 집단으로 이주시킨 결과 1930년에는 6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940년에는 14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일본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며 해방을 맞아 민주주의 공화국이 세워진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에는 1949년 공산주의 체제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중국에 살던 재외동포들은 수십 년간 우리와 소통이 단절됐다가 1992년 수교하면서 하얼빈·연길 등 중국 동북지역의 재외동포, 즉 조선족이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만주 북간도의 명동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을 기록한 학적부. 한국이민사박물관

만주 북간도의 명동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을 기록한 학적부. 한국이민사박물관

러시아 이민의 역사도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1860년 청나라와 국경조약을 맺으며 러시아는 우수리 강의 동쪽 지방인 연해주를 영토로 삼게 됐다. 1800년대 후반 조선에서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연해주를 중심으로 이민을 시작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연해주 지역에는 독립운동가·지식인 등이 모이며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군 정부가 조직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정책으로 17만여 명의 한인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열차를 타고 6000km를 이동하는 한 달여 동안 아이·노인 등 1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혹함을 딛고 한인들은 근면성을 발휘해 살아남았다. 한글로 된 시와 소설이 실린 신문을 발행하고, 극장을 설립해 지친 동포들의 외로움을 더는 등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도 힘썼다. 이들이 바로 고려인이라 불리는 재러시아·재CIS(구소련 연방의 일원이었던 독립국들) 동포다.

1800년대 만주·연해주로의 이주는 빈곤과 불안정한 사회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로 시작된 비공식적인 이민이다. 정부의 허락을 받은 첫 공식 이민은 미국 하와이 이민이다. 2021년 기준 미국에 사는 재외동포는 263만3777명으로, 전체 재외동포 중 35.96%를 차지해 가장 많다.

1923년 연해주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한인신문 ‘선봉’. 1919년 3·1운동에 자극받은 연해주 동포들이 ‘3.1 신문’에 이어 발간한 신문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1923년 연해주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한인신문 ‘선봉’. 1919년 3·1운동에 자극받은 연해주 동포들이 ‘3.1 신문’에 이어 발간한 신문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당시 미국 본토가 아니라 하와이에 이민을 많이 간 이유는 1800년대 중엽부터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되며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했기 때문이다. 중국인·일본인은 이미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인 데쉴러가 설립한 동서개발회사의 주도로 하와이 이민이 시작됐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선 개항장이었던 제물포를 비롯한 대한제국 내 도시 기차역·시장 등에 붙인 모집 공고를 볼 수 있다.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간 한인들을 실어나른 갤릭호 모형. 한국이민사박물관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간 한인들을 실어나른 갤릭호 모형. 한국이민사박물관

첫 하와이 이민 경로는 인천 제물포항→일본 나가사키항→하와이 호놀룰루항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해 2일 후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예방접종을 마친 뒤 미국의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에 타고 항해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전장 128.1m, 전고 9.0m, 전폭 12.9m 크기의 이 배는 총 6회에 걸쳐 이민자들을 수송했다. 호놀룰루에 입항 후 검역과 입국 절차를 마친 이들은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 농장 모쿨레이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한인 사탕수수 노동자는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았기 때문에 혼기를 훌쩍 넘긴 남성들이 많았다. 이에 1910~1924년 수백 명의 한국 여성이 사진을 통해 하와이 남성 이민자들과 선을 본 뒤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들을 ‘사진신부(Picture brides)’라고 부른다. 사진신부들이 하와이에 오면서 가정을 이루게 된 한인들을 기반으로 하와이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목에 걸고 다닌 방고(신분증). 한국이민사박물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목에 걸고 다닌 방고(신분증). 한국이민사박물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매우 어려웠으므로 외국에 나가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한 분도 많다. 박용만과 이승만 전 대통령처럼 독립운동 목적으로 하와이에 온 한인은 독립을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교육도 했다.

1905년에는 1033명의 한인이 이민 중개인을 통해 4년간의 계약노동을 전제로 새로운 삶을 찾아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했다. 이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지속해서 이뤄진 하와이 이민과는 달리, 이민 중개인에 의해 한 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 이민이었다.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 남부 살리나크루즈 항구에 도착한 한인들은 30여 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흩어져 4년간 노동해야 했다.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회에서 발행한 『KOREA MUST BE FREE』.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회에서 발행한 『KOREA MUST BE FREE』. 한국이민사박물관

에네켄 잎 할당량을 못 채우면 채찍으로 맞기도 했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불볕더위에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이질적인 문화는 정착 생활을 더욱 고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멕시코의 한인들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 계약 만기 3일을 앞둔 1909년 5월 9일 미주 대표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메리다 지방회가 창립됐다. 이후 멕시코의 동포들이 거주하는 각 지역에 지방회를 설립해 서로 도우며 독립운동도 후원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는 1917년 10월부터 멕시코 전역을 순방하면서 한인들을 위로하고, 독립운동을 고무시켰다.

재일한인들의 민족교육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재일한인 유아 교육교재 『어깨동무』. 한국이민사박물관

재일한인들의 민족교육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재일한인 유아 교육교재 『어깨동무』. 한국이민사박물관

2021년 기준 미국(263만3777명)과 중국(235만422명)에 이어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사는 나라는 일본(81만8865명)이다. 한인의 일본 이주와 정착 유형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전후로 나뉜다. 한일강제병합 전에는 외국인노동자라는 신분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일시체류한 유학생·외교관 등이 많았다. 하지만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인은 일본의 외국인노동자 입국제한에 해당하지 않게 돼 일본인 사업가들은 자국의 노동력 부족을 해소할 저임금 노동자를 데려오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재일조선인의 수는 1915년 3917명에서 1920년 3만189명으로 5년 만에 8배가량 증가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해당 토지와 연고관계를 신고한 사람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고,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국가 소유로 한 뒤 일본인 지주 및 토지회사에 넘겼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당시 대부분의 조선 농민은 문맹이었고, 근대법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수가 경작하던 토지를 빼앗겼죠.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일을 찾아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오사카로 쫓겨가는 노동자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적극 나섰다. 국가기록원

일본 오사카로 쫓겨가는 노동자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적극 나섰다. 국가기록원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에는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연합국과 대치했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1939년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해 1945년까지 조선인들을 일본·남사할린·남양군도 등으로 연행해 탄광·광산·철강·토목 산업 등에서 노역시켰다. 바로 강제징용이다. 군인이 모자라자 어린 학생까지 학도지원병이란 명목으로 강제징집하고,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 명의 여성을 동원했다. 이들 중 8만명가량이 소위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 2023년 오늘날까지 한일관계 쟁점인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이 이 시기에 불거진 비극이다.

광복 후에도 역사적 비극에 의해 대규모 이민이 행해진 시기가 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계기였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됐다. 이들은 외국의 원조와 민간단체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존해 미국·유럽 등 14개국에 입양됐다. 또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이 귀국하는 미군과 함께 이민한 경우도 있다.

전쟁터로 끌려가는 여인들. 일제는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여 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국가기록원

전쟁터로 끌려가는 여인들. 일제는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여 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국가기록원

한국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대한민국은 공장을 짓고 도로를 만들려고 해도 돈이 없었고 실업난은 심각했다. 정부는 실업률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한국인들을 독일로 보냈다. 1963년 정부와 서독탄광협회의 협정 체결을 계기로 한국 광부들의 독일 진출이 시작됐다. 또 1965년 의사였던 이수길·이종수씨가 한국 간호사를 독일 병원에 취업시킨 것을 계기로, 1969년 한국의 해외개발공사와 독일병원협회의 간호인력 고용에 대한 정식 협약이 체결되면서 정부 주도로 간호사들이 독일로 향했다. 1970년대 말까지 파독 광부는 약 8000여 명, 파독 간호사는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1971~1972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조선기술자 약 300여 명이 함부르크시에 있는 호발트 조선서로 진출하기도 했다. 3년 노동계약으로 떠난 이들은 계약 만료 후 대부분 귀국해 한국 조선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광부·간호사·조선기술자 등 재독한인 노동자들이 낯선 환경에서 힘들게 번 월급은 대부분 달러로 환전돼 한국의 가족·친지들에게 송금됐다. 1960~70년대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연간 약 5000만 달러로, 한국 경제개발에 기여했다. 한때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하기도 했다.

파독 광부가 독일 광산에서 근무시 착용했던 작업모와 장비들. 한국이민사박물관

파독 광부가 독일 광산에서 근무시 착용했던 작업모와 장비들. 한국이민사박물관

독일에 간 한인들은 근면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았으나, 독일정부가 1973년 외국인 인력 모집 정책을 중지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인 이들은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체류권 투쟁을 시작했다. 독일 이민의 역사 전시관에는 한쪽 팔이 잘린 간호복이 있다. 독일 내 외국인 노동자 추방 운동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자른 것이다. 재독한인 중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귀향한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정착하도록 조성된 경남 남해독일마을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를 통해 살펴본 한인들의 이민 과정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맞물려 있다. 중국·러시아·일본·미국·멕시코·독일 외에도 우리 동포들은 오대양 육대주 193개국에서 살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아 이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 우리 아이가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질 것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관람 안내

장소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 329(북성동)
관람시간 09:00 ~ 18:00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월요일은 제외), 1월 1일
관람요금 무료
관람문의 032-440-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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