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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선제 되면 대선 불출마”…전두환에 던진 DJ 승부수-김대중 육성 회고록〈1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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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15〉

김영삼(YS) 전 신민당 총재가 1983년 5·18 3주기를 맞아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다. 구속 인사 석방과 언론 자유 등을 요구하며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맞선 항거였다.

나, 김대중(DJ)은 미국으로 쫓겨나 망명 생활 중이었다. YS와 나는 정치적 라이벌이면서 민주화 동지였다. 경쟁하면서 연대하는 관계다.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손잡아야 한다. 누구와는 하고, 누구와는 안 하는 것은 내부 분열이며 일(민주화)을 안 되게 할 뿐이다.

나는 YS에게 “귀하의 투쟁에 성원을 다 하기로 결심했다”고 전보를 보냈고, “단식 투쟁이 한국민의 민주 열망을 대변한 희생적인 결단임을 인식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YS를 지지하기 위해 워싱턴DC에서 문동환 목사 등과 함께 목에 피켓을 걸고 길거리로 나섰고, 뉴욕에선 연설했다. 6월 9일자 뉴욕타임스(NYT)에 ‘Kim’s Hunger Strike for Democracy in South Korea by Kim Dae Jung’(한국 민주화를 위한 김영삼의 단식투쟁, 글 김대중)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이제는 돌아갈 때 됐다”

1985년 3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하는 모습. 84년 5월 민추협 출범 당시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오른쪽)가 공동의장을, 김상현 전 의원이 대신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아왔다. [사진 민주화추진협의회]

1985년 3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하는 모습. 84년 5월 민추협 출범 당시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오른쪽)가 공동의장을, 김상현 전 의원이 대신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아왔다. [사진 민주화추진협의회]

우리 둘의 연대는 이듬해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YS가 공동의장을, 나를 대신해 김상현 전 의원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한국에서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더는 미국에 눌러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신상 안전을 위해 외국으로 피해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고, 미국 여론과 정부가 기대만큼 움직이지 않았으며, 국내 민주화운동은 침체해 있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됐다”는 판단이 섰다.

귀국을 고민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나에 대한 모략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나에 대해 ‘용공’ ‘빨갱이’ ‘거짓말쟁이’ 등 갖가지 소문을 창작해 음해했다. 전혀 진실과 거리가 멀지만 거짓을 반복하면 처음에는 ‘설마’ 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믿게 된다. 괴담의 법칙이다. 미국에 있는 나로서는 그런 낭설들에 대해 일일이 해명할 길이 없었다. 권력의 탄압보다 국민의 오해가 더 고통스러웠다.

“아키노처럼 암살될 수 있다”

경찰이 1985년 2월 8일 김포공항 앞을 봉쇄하며 귀국하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경찰이 1985년 2월 8일 김포공항 앞을 봉쇄하며 귀국하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그해 가을, 한국 대사관과 미국 국무부에 귀국 의사를 전달했다. 한국 정부는 “오지 마라”는 신호를 보냈다. 안기부 요원이 찾아와 귀국을 강행하면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한국 정부는 “김씨(DJ)가 도미 후 신병 치료에 전념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인권’ ‘민주화’를 표방하면서 국내의 제반 상황을 비난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해왔다. 귀국할 경우 법에 따라 필요한 조처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나는 80년 5·17 이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신병 치료를 위해 82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도미(渡美)했다. 정권의 뜻에 반해 귀국할 경우 감방에 처넣어 18년의 잔여 형기를 채우게 하겠다는 겁박이었다.

미 국무부는 83년 8월 필리핀 마닐라공항에서 암살된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 같은 비극이 재발할까 걱정했다. 한·미 정부의 반대에 불구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굽힐 수 없었다. 투옥을 각오했다. 85년 2·12 12대 총선도 다가오고 있었다. 민추협을 모태로 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1월 18일 창당됐다.

2년 2개월 망명 접고 고국 땅에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1985년 2월 18일자에서 목숨을 건 귀국 스토리를 커버로 다뤘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1985년 2월 18일자에서 목숨을 건 귀국 스토리를 커버로 다뤘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D-데이는 총선 4일 전인 2월 8일로 정했다. 총선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나는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독재 지배하에서도 국회는 국회다. 국회는 언론의 자유와 신변이 가장 보장되는 공간이다. 혁명하지 않는 이상 국회에 들어가 정치 투쟁을 하는 게 맞다.

국제 여론은 나의 귀국이 ‘제2의 아키노 사태’가 될지 몰라 예의주시했다. 에드워드 페이건 등 미 하원의원 두 명, 토머스 화이트 전 대사, 브루스 커밍스 교수 등 미국 고위 인사 27명과 기자 수십 명이 나의 비행기에 동승해 인간 방패처럼 나를 호위했다.

2월 8일 오전 11시 40분, 2년 2개월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승객들은 다 빠져나갔는데 우리 일행은 내보내지를 않았다. 정부 기관원을 따라 뒷문으로 내리다 살해된 아키노의 최후가 머리에 번뜩 스쳤다. 일반 승객과 우리 일행을 갈라놓으려는 사복 경찰과 실랑이가 벌어지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들은 나와 아내를 커튼을 친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실어 서울 동교동 집으로 빼돌렸다. 김포공항과 동교동 집 주변에 귀국을 환영하려 몰려든 인파에 손짓조차 할 수 없이 철저히 차단당했다. 고국 도착과 동시에 집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폭풍의 귀국’(A Stormy Homecoming)이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에서 나의 귀국을 다뤘다. “50여명이 넘는 사복 요원들은 미국인 몇 사람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김대중씨를 엘리베이터에 처박았다. 김대중씨와 부인은 흰색 마이크로버스에 실려 공항 뒷길을 통해 자택으로 압송됐고 자택에 도착한 즉시 가택연금에 처했다.”

선거 나흘 전의 전격적인 귀국은 반향이 컸다. 강제로 망명길을 떠났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돌아왔다는 나의 스토리가 유권자에게 큰 울림을 던졌다. 여기에 YS와 힘을 합친 덕분에 야당 신민당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신민당은 군부 독재 비판,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당시로써는 금기시됐던 발언들을 쏟아냈다. 군부 독재에 억눌린 민주화 갈망이 폭발했다. 창당한 지 1개월도 채 안 된 신민당은 67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의 친위 쿠데타설

YS와 함께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아 정치 전면에 다시 나섰다. 대통령 직선제 관철이 최대 현안이었다.

그러던 86년 1월 16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 연설에서 개헌 논의를 미루자고 느닷없이 던졌다. “대통령 선거 방법의 변경은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국가적 과제가 성취되고 난 연후인 89년에 가서 논의하자”고 했다. 88올림픽을 핑계로 개헌 논의를 지연시켜 장기 집권을 도모하겠다는 술책이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민추협과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 추진 1000만 명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전국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집회가 이어지고, 정권 교체의 국민적 열망이 거세게 타올랐다.

그러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전두환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친위 쿠데타를 도모한다는 얘기였다. 그들은 직선제를 하면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불안해했다. “직선제를 하면 김대중에게 좋은 일만 한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는 좌익으로 간다”고 선동했다.

“대통령 포기하더라도 독재 끝내야”

공안정국이 조성됐다. 농성 중이던 대학생 등 1200여 명을 한꺼번에 구속하는 ‘건국대 사태’가 터졌다. 10월 28일 서울 건국대에서 대학생 2000여 명이 집결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집회를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건국대 사태 와중에 북한의 금강산댐 계획이 뜬금없이 폭로됐다. 정권은 “북한이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는데 200억t 규모의 수공(水攻)을 하려 한다”고 발표했다. ‘여의도 63빌딩의 절반이 물에 잠긴다’ ‘원폭 투하 이상의 피해’ 등 공포의 뉴스가 쏟아졌다. 훗날 밝혀졌지만, 조작된 허구였다.

안보 위협을 부풀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무산시키려는 공안 정국을 돌파해야 했다. 대통령을 포기하더라도 전두환 독재는 끝내야 했다. 11월 5일 ‘조건부 대통령 불출마 선언’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사면·복권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선언한다.”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를 하면 죽는 줄 알았다. 그들이 안 받아들일 거로 예상했지만, 받아들이면 좋고, 안 받아들이면 그들을 궁지로 몰 수 있었다.

격동의 87년, 우리 현대사에 획을 그은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6811)을 보실 수 있습니다.

16회 〈6월 항쟁과 13대 대선〉이 이어집니다.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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