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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자주의, 한국이 가야 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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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라몬 파체코 파르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교수·브뤼셀자유대학 KF 석좌교수

라몬 파체코 파르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교수·브뤼셀자유대학 KF 석좌교수

지난 18일 한·미·일 정상회담은 최근 몇 년간 진전돼온 세계 정치의 현장을 확인해주었다. 소다자주의(Minilatelalism)가 다자주의(Multilateralism)를 대체하여 국가 간 협력의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은 일본·호주·캐나다·유럽연합(EU) 등과 함께 국제 협력을 촉진하고 국가 간 긴장을 줄이기 위한 주요 협의체로서, 유엔 또는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다자 기구를 오랫동안 지지해왔다. 그러나 미·중 경쟁은 냉전 이후 이어졌던 다자주의 황금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다자간 통치를 지원하는 독점적 기관이었던 주요 20개국(G20)도 미·중 갈등으로 제 기능을 못 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마비 상태가 더욱 심해졌다.

미·중 대립에 유엔·WTO 등 위축
한·미·일, G7+ 등의 역할 커져
중국과 협력 공간은 열어 놔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한국은 소다자 네트워크 강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다자주의 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늘날 한국이 외교정책과 안보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될 협의체가 무언인지 분명히 인식하는 걸 의미한다. 윤석열 행정부가 세계 정치의 새로운 현실을 이해한 것은 칭찬할만한 일이다. 한·미·일 3국 협력은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다. 정상회담, 실무회담, 합동훈련, 정보공유는 3국 협력이 한국의 안보를 튼튼하게 만드는 구체적 방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관심이 안보 분야 소다자 협의체에만 있지 않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와 올해 마드리드와 빌뉴스에서 각각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일본·호주·뉴질랜드 정상들과 함께 ‘나토+AP4’의 일원으로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AP4 국가들은 브뤼셀에서 또 다른 나토 회원국들과 정기적 실무 회의를 조용히 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사이버 안보에서 핵 비확산에 이르는 문제 등에서 한국의 안보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국 지도자들은 오래전부터 무역과 경제 분야에서 소다자주의가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해왔다. 한국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에 가입하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을 신청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들 협정은 중국이 현재 가입할 수 있거나 앞으로 가입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윤 정부는 기술과 공급망 등의 경제 분야에서도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듯하다. 한·미·일 3국 협력, 인도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IPEF), 광물안보동반자협정(MSP), 칩4 동맹 등은 중국보다 기술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파트너들과 협력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반도체든 AI든 첨단기술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을 끌어들이고 중국을 배제하는 게 안보 분야에서는 이롭겠지만, 한국의 경제 전략 측면에서는 제대로 작동하기 힘든 만큼 중국과 협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EU를 포함한 G7 회원국들과 호주·인도가 참여하는 비공식적 ‘G7+(플러스)’ 네트워크의 일원이 된 것 같다. G7은 서방 위주의 모임이어서 지구촌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인식을 줬는데, G7+를 통해 회원국 간 세계 정치·경제적 협력 강화에 더 집중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일부에서는 한국이 소다자주의에 집중하는 게 미·중 사이 ‘선택’을 의미한다고 조바심을 낼지 모른다. 그러나 다자주의가 계속 마비되는 한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소다자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한국은 가능하면 중국과의 협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 포함된 소다자주의는 제2의 트럼프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할 경우 무산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중·미 화해로 둘 사이에 선택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희망을 갖고 소다자주의 협의체를 외면한다면 한국은 고립될 위험이 있다. 게다가 미국의 동맹과 우방은 소다자주의 협의체 참여가 정권에 상관없이 미국 정부의 관여를 끌어내는 방안으로 보고 있다. 한국도 소다자주의 강화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이 자원을 기여하면 반대급부로 구체적인 이익을 얻을 수 협의체라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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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몬 파체코 파르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교수·브뤼셀자유대학 KF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