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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수천만원 뜯긴걸론 부족? 피해자들이 직접 수사해야 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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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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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이런 대화방이 있다. ‘부업사기 쇼핑몰부업 팀미션 사기 당한 피해자모임 본방.’
채팅방 참가자들은 일당 5만원의 쇼핑몰 재택업무에 지원했다가 보이스피싱 유형의 ‘팀 미션’ 사기를 당한 피해자다. 피해자의 안내로 지난달 채팅방에 들어갔다. 당시 피해자는 79명이었다. 한 달 사이 161명으로 늘었다. 이 글을 쓰는 사이에도 새 피해자가 찾아왔다. 채팅방 밖의 피해자 규모는 짐작이 안 간다.

일당 5만원 미끼로 보이스피싱

피해 95% 여성…경찰 수사 더뎌

이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운영난 속에 한 푼이라도 보태고 싶었던” 어린이집 원장, “청소 일하며 열심히 산 나에게 주는 선물인 줄 알았다”는 주부, “세 딸을 키우려 재택업무를 해왔다”는 싱글 맘, “추석 때 부모님 선물 사드리고 싶었다”는 사회초년생 등, 가슴 쓰린 얘기들이다. 소송을 희망하는 피해자 신상을 집계한 결과 44명 중 42명이 여성이었다. 95%가 넘는다.

음성 대신 문자로 대화하는 것만 빼면 다른 사람의 계좌와 전화를 이용한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이다. 일부 피해자가 범인과 통화한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조선족 말투에 낯선 어휘를 사용한다.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한 이후에도 이들은 보란 듯이 쇼핑몰을 운영하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다. 범인이 검거됐다는 소식은 채팅방에 전해진 적이 없다.

지난해 7월 서울동부지검에 ‘보이스피싱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이 출범했다. 범정부 역량을 총결집해 ‘원 팀’으로 최말단의 대포통장 제공자부터 최상위 조직 총책까지 강도 높은 합동수사를 실시한다고 했다. 합수단은 출범 이후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이 2022년 5438억원으로 전년의 7744억원보다 크게 줄었다고 지난 3일 발표했다. 검찰・경찰・금감원・국세청・관세청・방통위・출입국관리사무소・국정원 등 유관기관이 전문역량을 결집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김호삼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장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서 합수단 출범 1년 성과 및 향후 방향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호삼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장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서 합수단 출범 1년 성과 및 향후 방향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한 뒤의 상황은 ‘원 팀’의 대응과는 거리가 멀다. 검찰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당한 범죄에 대해 “아직 합수단에서 수사할 사안은 아닌 듯하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한 경찰관은 “계좌 위주로 각 경찰서에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고 피해 금액도 커져야 조직적인 수사가 가능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수천만 원을 뜯긴 서민들에겐 절망적인 얘기다. 이런 울분이 이들을 모이게 했다. 이번 피해로 경찰서에 처음 가본 사람들이 직접 사례를 모으고 분석을 시작했다. 이들이 만든 자료를 보면 전국 각지 경찰서에 똑같은 범죄가 접수되고 있다. 경기 수원남부경찰서에 5건, 인천 계양경찰서 5건, 광주 광산경찰서 3건, 부산 해운대경찰서 2건, 전북 군산경찰서 2건, 충남 아산경찰서 2건 등 한 경찰서에 여러 건이 접수된 경우도 다수다. 그러나 경찰서마다 따로 수사한다. 진척이 제대로 될 리 없다.

범죄 당한 161명 직접 범인 추적

같은 쇼핑몰에서 여러 명에게 돈을 뜯어낸 사실도 밝혀냈다. F 몰에서 발생한 9건은 각기 다른 경찰서에서 수사하고 있다. 계좌의 주인도 여러 건이 겹친다. 한 피해자는 “지인을 통해 IP를 추적한 결과 중국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이 줄었다는 정부 발표는 이처럼 ‘원 팀’ 수사를 회피하는 신종 기법이 누락됐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조직이 활용하는 계좌는 즉시 정지를 당하지 않아 경찰과 은행 신고 후에도 피해가 이어진다.

피해가 더 나와야 통합적인 수사가 될 텐데 전국 258개 경찰서마다 몇 건씩 접수되면 요건을 충족하는 걸까. 일당 5만 원짜리 일자리에 반색하는 서민이어서 1억 원 이상 뜯길 여력이 없는데 피해 금액이 얼마까지 올라가야 체계적 수사를 시작할까.
피해자들은 어렵게 만든 범죄 분석 문서를 어디에 줘야 할지도 막막해한다. 한 피해자는 “수사관에게 이런 게 있다고 얘기해도 다른 사건은 자기의 수사 대상이 아니라며 별 관심이 없더라”고 말했다. 사기 범죄 전문가인 임채원 전 서울동부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장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폐해라고 지적한다. 임 전 단장은 “예전엔 담당 검사가 관내 경찰서 사건들을 함께 가져와서 경찰관들과 회의도 하면서 전체적인 수사를 진행했는데 지금은 검찰이 관여를 못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0월 21일 ‘제77주년 경찰의 날’에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기념사를 했다.
“어려운 이웃과 취약계층을 울리는 사기 범죄는 갈수록 수법이 교묘해지고 국민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중략) 서민을 눈물짓게 하는 사기 범죄는 끝까지 추적한다는 비상한 각오로 임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채팅방에 모인 피해자 161명보다 이 말에 더 적합한 국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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