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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어느 희귀병 환자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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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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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후 9시 6분에 휴대전화로 뜻밖의 부고 문자가 날아들었다. ‘고 황원재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불과 9개월 전 경북 구미의 집에서 밝은 모습으로 만났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문자의 발신지는 그의 휴대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부인 김상민(34)씨가 받는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찾아뵀던 중앙일보 기자인데 부고 문자가….”

 “예 오늘….”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향년 37세인 황씨는 희귀병인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다. 2016년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그의 죽음은 울림이 작지 않다. 우리나라 희귀병 치료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속해서 제기해왔기에 많은 사람이 그의 덕을 봤다. 외국 치료제인 ‘루타테라’가 조기에 들어온 게 대표적이다. 네이버에서 ‘황원재’를 검색해봤다.
 ‘황원재 대표님의 부고 소식을 알립니다’라는 글이 맨 위에 떴다. 클릭하자 ‘한국 신경내분비종양 환우회’ 카페가 나온다. 회원 2598명에 매니저가 ‘황원재’다. 카페에 올라온 글엔 황씨의 기여가 적혀 있다.
 ‘7년의 투병생활을 하면서 치료제 국내도입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하셨고, 그 결과 많은 환자가 해외를 나가지 않아도 루타테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기암 치료제 국내 허가 안 나

해외 가야 하는 환자 위해 분투

 황씨를 처음 만난 건 1년 9개월 전이다. 해외 치료를 받는 희귀병 환자들이 코로나19 때문에 큰일이라는 의료계 인사의 걱정을 듣게 됐다. 해당 치료는 국내 의학기술로 충분히 가능한데도 보건 당국의 규제 때문에 환자들이 아픈 몸으로 외국을 전전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 변화를 주도한 사람이 황씨다. 그는 국회·식품의약품안전처·희귀필수의약품센터 등을 무수히 접촉했다. 우공이산 같은 노력은 치료제가 조기 도입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희귀암 환자 황원재씨(가운데)의 2021년 9월의 모습(왼쪽)과 지난해 9월의 모습(오른쪽). 1년 사이 항암 치료를 받느라 탈모가 심해졌고, 아들 시온이는 많이 자랐다. 강주안 기자

희귀암 환자 황원재씨(가운데)의 2021년 9월의 모습(왼쪽)과 지난해 9월의 모습(오른쪽). 1년 사이 항암 치료를 받느라 탈모가 심해졌고, 아들 시온이는 많이 자랐다. 강주안 기자

 정작 자신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병의 특성상 특정 치료제를 일정 기간 사용하면 약효가 떨어져 다른 치료로 옮겨가야 한다. 황씨는 루타테라 치료가 한계에 달해 ‘악티늄’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이번엔 악티늄의 국내 허가가 안 나 독일을 가야 했다.
 황씨의 사연을 취재한 중앙일보 보도가 나가자 식약처는 국내에서도 악티늄을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 임상 시험을 승인할 때까지 1년 2개월이 걸렸다. 황씨 덕분에 악티늄 치료도 가능해졌지만, 그는 이번에도 혜택을 못 받았다. 그 사이 몸 상태가 ‘LM3'라는 치료로 바꿔야 할 처지가 됐다. 한 번에 4000만원 넘는 비용을 들여 독일을 오갔다. 지난달 악화한 상태로 다시 독일에 건너가 치료를 받고 귀국한 뒤 병원에 입원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악티늄 도입 길 텄지만 자신은…

 황씨의 비극은 우리나라 의약품 수입 허가가 제약회사가 나서야만 원활하게 이뤄지는 시스템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제약회사가 아니면 의약품 수입 허가를 받기 어려운데 희귀병 치료제는 환자 수가 적어 돈벌이가 안 되니 제약사가 외면한다는 얘기다.

 강건욱 서울대 핵의학과 교수는 “최근 악티늄 치료와 관련해 미국에 다녀 왔다”며 “캐나다에선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말기 암 환자의 경우 문헌 근거가 있는 치료법을 규제기관에 신청하면 허가해준다는 게 의료진 얘기”라고 소개했다. 의사의 재량으로 규제기관의 허가 없이도 약을 사용할 수 있는 독일처럼은 못 하더라도 캐나다 수준으로는 허용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새 의약품 사용에 대한 당국의 우려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치료 방법이 없어 죽음만 기다리는 환자라면 의료 선진국에서 활용하는 의약품 정도는 시도해도 되지 않을까.

 말기암 환자가 치료를 위해 해외로 가는 과정은 위태롭다. 황씨의 부인은 “독일로 떠나기 전 남편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아서 미루고 싶었지만, 독일 일정이 정해져 있고 이번에 못 가면 언제 가능할지 몰라 출국했다”고 말했다. “귀국하자마자 혼자 입원했는데 그 몸으로 트렁크를 들고 공항에서 병원까지 갔을 생각을 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라고도 했다.

 대기업 사내 부부인 두 사람은 월급을 전부 모아 독일 병원에 갖다 주는 생활을 지속해왔다. 취재 당시 황씨는 “아들 시온이(5)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함께 있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도 못 보고 이별했다.

 독일로 마지막 치료를 떠나기 직전 황씨가 카페에 올린 글을 찾아봤다. 다른 환자들이 상담해온 내용을 소개하면서 ‘아직도 악티늄을 안 한다고 저한테 버럭버럭…’이라고 쓴 대목이 눈에 띄었다. 병세가 나빠져 해외로 떠나는 그가 악티늄 국내 도입이 늦어지는 원망까지 들으며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는 일이 과연 온당한가.

2021년 9월 촬영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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