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뚝뚝 떨어트려 비커 받더라" 해외 내몰린 희귀암 환자들

중앙일보

입력 2021.09.11 14:05

업데이트 2021.09.11 18:17

 부산에 사는 곽모씨는 근심이 크다. 전립선암에 걸린 남편이 국내에선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나빠졌다. 독일 병원에서 하는 ‘악티늄’ 치료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에 두 차례 독일로 가 치료를 받았다.
문제는 막대한 비용이다. 한 번 갈 때마다 4000만원 이상 비용이 들었다. 낯선 독일서 진료를 받으려니 병원 시스템을 알지 못하고 독일어도 몰라 이를 도와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곽씨는 "치료비도 엄청나지만 이런 수속에 도움을 받는 데만 300만원이 든다"며 "평생 모은 재산을 다 털어 넣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같이 해외를 다니며 치료를 받는 지인이 부산에만 4~5명 있다"고 말했다.

곽씨의 남편은 독일 치료에 앞서 말레이시아를 다녀왔고 중국 병원까지 갔다. 외국에서 암 환자들에게 쓰는 의약품이 규제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탓이다.

의약품 수입 규제 때문에 말레이시아와 인도ㆍ독일(왼쪽부터) 병원을 다니며 암 치료를 받은 황준모 씨. [사진 황준모 씨]

의약품 수입 규제 때문에 말레이시아와 인도ㆍ독일(왼쪽부터) 병원을 다니며 암 치료를 받은 황준모 씨. [사진 황준모 씨]

희귀암인 신경내분비종양을 앓고 있는 황준모(43)씨 역시 말레이시아와 인도를 거쳐 독일까지 가서 악티늄 치료를 받았다.
그는 의료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치료를 못 받고 동남아 등지를 다니며 겪었던 충격을 털어놨다.
황씨는 "인도의 의사들은 친절하지만, 시설이나 진료 환경은 낙후했다"며 "검사를 위해 피를 뽑을 때 우리는 주사기로 뽑으면 그만이지만 인도에선 피를 뚝뚝 떨어지게 해서 비커에 받는 일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혈압을 잴 때도 손으로 펌핑을 하는 과거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한국의 의료 기술이 훨씬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의약품 규제 때문에 말기 암 환자들이 우리보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나라들을 다니며 치료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는 "독일에서 판매하는 약의 원료인 악티늄만 수입하면 국내에서 얼마든지 조제하고 치료할 수 있다"며 "그러나 정부에서 허가가 안 났기 때문에 환자들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는 ″정부가 악티늄 수입만 허용하면 치료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강주안 기자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는 ″정부가 악티늄 수입만 허용하면 치료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강주안 기자

까다로운 수입 규제가 희귀암 환자를 해외로 내모는 셈이다. 독일에서 의약품을 들여와 치료하는 동남아 국가들로 환자들이 찾아간다.

신경내분비종양 환우회 대표를 맡고 있는 황원재(35)씨는 말레이시아에서 겪었던 황당한 경험을 털어놨다. 공항에 도착해 병원으로 가기 위해 그랩 택시를 탔는데 기사와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어디서 오셨나요.”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의사인가요?”

“아닙니다. 치료받으러 병원에 가는 겁니다.”

“노스 코리아(북한)에서 왔나요?”

“아닙니다. 사우스 코리아(남한)에서 왔습니다.”

“왜 사우스 코리아에서 말레이시아로 치료를 받으러 오나요?”

황씨는 “희귀암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하면 말레이시아 사람들조차 의아하게 생각한다”며 “희귀암 환자들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우리나라 국격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희귀암 환자 황원재씨(가운데)는 세 살 아들 시온이가 “아빠 아파?”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정부가 치료제 수입을 허가해 국내서 치료 받기를 갈망한다. 강주안 기자

희귀암 환자 황원재씨(가운데)는 세 살 아들 시온이가 “아빠 아파?”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정부가 치료제 수입을 허가해 국내서 치료 받기를 갈망한다. 강주안 기자

독일서 치료받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황준모씨는 “독일 병원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데 병원 측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진료 접수를 환자가 다 알아서 해야 하고 치료비 지급 방식도 생소하다”며 “해외 상품 구매 업무를 담당해 비교적 외국인과 소통에 익숙한 나도 어려움이 컸는데 대부분 환자들은 훨씬 고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자 희귀암 환자들의 상황이 날로 악화하고 있다.

지난 7일 자 중앙일보 보도로 희귀암 환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이 보도되자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대처 방안을 모색 중이다. 문은희 식약처 의약품정책과장은 10일 “핵의학 전문가들을 통해 외국 사용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며 “다른 기관에서도 악티늄을 들여와 연구자 주도 임상 시험을 추진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문 과장은 지난 3일 희귀암 치료제 수입과 관련해 “환자 단체와 간담회도 하며 방법을 모색한다”며 “식약처장 허가를 안 받고 들어올 수 있는 약도 정해놨다”고 설명했다.

식약처는 특히 의료 선진국에서 임상 시험 중인 의약품은 정식 허가가 나기 전에도 말기 암 환자 등에게 쓸 수 있도록 한 약사법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과 협력해 지난해 12월 제출했다고 설명했다. 말기 암 환자가 아픈 몸으로 해외를 전전하는 어려움을 덜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가 되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해 12월 말기암 환자용 의약품은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국회에서 통과가 되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해 12월 말기암 환자용 의약품은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국회에서 통과가 되지 않고 있다.

식약처는 이 법안 통과 전에라도 주요 국가에서 임상 시험 중인 약은 허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희귀ㆍ필수의약품센터에 신청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문 과장은 “악티늄은 우리에게 요청이 없어서 몰랐던 사안”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5월에는 미국ㆍ일본ㆍ영국ㆍ독일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스위스ㆍ캐나다 등 8개국에서 임상시험 대상 의약품은 사용할 수 있다는 공문을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등에 보냈다. 악티늄은 독일에서 사용하는 치료제인데 왜 못 들어온 것일까.

서울대 강건욱 교수는 “식약처가 말하는 임상시험은 정부 승인 임상시험을 말한다”며 “이는 주로 제약회사가 해당 의약품을 시판하기 위해 진행한다”고 설명한다. 강 교수는 “그러나 희귀병 치료제는 환자 수가 적어 제약회사들이 안 나선다”면서 “이런 사정 때문에 독일에서 생산한 악티늄은 정부 차원이 아닌 연구자 임상시험을 거쳐 이미 치료에 널리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정부가 공인한 의료 선진국이다. 악티늄은 독일 병원에서 치료에 사용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가 요구하는 허가 요건과 안 맞는다는 게 의료계 판단이다. 결국 환자들이 독일로 가서 치료를 받거나 악티늄을 수입해 치료하는 인도 등지로 갈 수밖에 없다.
악티늄 수입 허가 요청이 없어 몰랐다는 당국의 설명에 환자들은 답답해한다. 황준모 씨는 “암을 통보받은 환자와 가족의 입장에선 어떻게 치료할지 막막할 뿐”이라며 “어떤 의약품을 수입해서 어떻게 치료할지를 환자한테 신청하라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이고은 식약처 부대변인은 “희귀병 환자 단체와 간담회 등을 통해 환자들의 고충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희귀암 치료제 ‘악티늄’을 들여와 국내에서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방침이 전해지자 환자들은 희망을 비친다. 의료기관도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코로나19로 많은 환자들이 해외 출국에 지장이 생겨 병세가 악화한 상태에서 도입이 계속 늦어질 경우 사망하는 환자가 속출할 우려가 제기된다.

강건욱 교수는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들은 전이가 계속 진행되는 상황이라 치료를 받지 않으면 결국 돌아가실 수밖에 없다”며 “치료 시기를 무작정 늦출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지난달 중앙일보 취재진에게 "빨리 약을 들여와 한 번이라도 치료를 받아보고 싶다"고 부인을 통해 뜻을 전했던 강호덕(46)씨가지난주 끝내 숨져 신경내분비종양 환우회 회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강씨의 부인 이재경(39)씨는 "신랑이 꼭 치료를 받고 살겠다는 의지가 강해 저와 세 아이에게 유언도 하지 않고 버티다가 갑자기 상황이 나빠지는 바람에 한 마디도 못하고 떠났다”면서 “의식이 있을 때 ‘꼭 치료받고 아이들과 글램핑을 가자, 안면도를 가자, 전주 남부시장에 순대국밥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결국 하나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말을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의 얘기에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씨는 “신랑에게 ‘다음엔 꼭 부유하게, 건강하게 태어나서 다시 부부로 살자. 애들 잘 키울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며 “세 아이는 코로나 때문에 아빠를 만나지 못하다 의식을 잃고 난 뒤에야 아빠의 마지막 얼굴을 봤다”고 했다. 그는 “우리 신랑은 결국 치료를 못 받고 떠났지만 다른 환우들이라도 국내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면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악티늄 국내 치료를 희망해온 황원재씨는 오는 16일 독일로 출국한다고 밝혔다.

강주안 기자 joo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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