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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실패에도 아버지가 많은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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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중앙SUNDAY 편집국장

예영준 중앙SUNDAY 편집국장

사회심리학에 귀인(歸因)이론이란 게 있다. 사람들이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을 어떤 방식으로 귀속시키는지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이론인데, 이 중에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로 ‘자존적 편향(self-serving bias)’이 거론된다. 자신이 범한 실패의 원인을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많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바꾸면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쯤 될 것이다.

야당 남탓 타령에 여당마저 동참
잼버리 파행 놓고도 몰염치 공방
책임 인정 외면하면 실패는 반복

한국 정치는 이 편향이 가장 잘 통하는 세계다. 특히 야당에는 정부의 실패를 찾아내고 이를 집권당의 책임으로 귀속시키는 것이야말로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정치학자 함성득은 ‘대통령의 불행과 정치구조’란 글에서 “사사건건 정부 발목을 잡아 실패를 유도하는 것만큼 쉬운 집권 전략은 없을 것”이라고 썼다. 그러니 ‘남 탓’ 타령은 야당으로서는 존재 이유에 버금가는 일인지 모른다.

언제부턴가 ‘남 탓’ 타령의 대열에 여당도 합류했다. 여당의 ‘전임 정권 탓’은 지지층을 확실하게 결속하고 견인하는 전가의 보도가 된 지 오래다. 전임 정부가 남긴 강고한 구조적 제약에 묶여 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란 프레임으로 실수나 실패를 가리곤 한다.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이명박-박근혜 정부 탓을 했다. 성장률이 부진해도, 부동산값이 폭등해도, 여름에 물난리가 나도 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전 정부 탓’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이제 출범 1년을 훌쩍 넘겼으니 졸업할 때도 됐는데 그럴 기미가 없다. 여소야대의 한계를 안고 출범한 까닭에 ‘야당 탓’까지 더 보탰다. 그 결과 지금 한국 정치는 ‘남 탓’ 경연장처럼 되어 버렸다.

새만금 잼버리는 누구 말마따나 모든 국민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준 게 사실이다. 피날레를 장식한 K팝 공연을 본 대원들이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한 것을 곡해하면 곤란하다. 야영 체험을 통한 교육의 장이 돼야 할 잼버리가 서바이벌 게임을 거쳐 한국문화탐방으로 끝난 게 처음이란 의미일 뿐이다. 대원들에게 ‘꿩 대신 닭’을 안겨준 건 미봉책이나 고육책은 될지언정, 실패를 성공으로 둔갑시키는 마법이 될 순 없다. SNS 등 온라인 공간에는 길거리에서 외국인 대원 행렬을 만난 시민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인솔자의 양해를 구하고 아이스크림을 한 아름 사줬다는 등의 얘기가 넘친다. 적어도 우리 국민은 염치를 알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에 지금 정치권에서 오가는 ‘네 탓이오’ 공방은 몰염치의 극치다. 이 참담한 실패의 책임은 너나없이 모두가 함께 지고 석고대죄해야 할 일이란 것쯤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2017년 8월에 유치가 확정돼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특별법까지 만들고, 다시 정권이 바뀌어 1년3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일이라면 책임 소재는 여와 야, 전 정권과 현 정권 따질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 “주무부처는 여가부였다”거나 “아니, 실제 일을 한 건 지자체였다”는 식의 낯 뜨거운 책임 공방까지 벌어지고 있다. 안타까운 건 이런 일이 비단 잼버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 현안에서 상시화해 있다는 점이다.

‘성공은 수백 명의 아버지가 있지만, 실패는 고아’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아무도 실패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속담이 지금의 한국 정치에선 적용되지 않는 게 분명하다. 한국에선 실패에도 아버지가 많다. 그 이유가 “내 탓이오”라고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이 많아서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실상은 “그 아버지는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고, 저쪽 집안 사람”이라고 서로 삿대질하며 몰아세우는 형국에 가깝다. 정작 국민이 부끄러워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책임을 자인하고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삼으려는 노력은 여건 야건 관심권 밖이다. 그러니 실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운명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