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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가면 구속자 풀어주겠다” 안기부 회유…DJ 망명 결심-김대중 육성 회고록〈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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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14〉

미국 잡지 ‘피플(People)’의 1983년 2월 14일자 88면에 실린 인터뷰 사진. 미국 2차 망명 시절 이희호 여사(왼쪽)의 설거지를 도와주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미국 잡지 ‘피플(People)’의 1983년 2월 14일자 88면에 실린 인터뷰 사진. 미국 2차 망명 시절 이희호 여사(왼쪽)의 설거지를 도와주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82년 12월의 어느 날, 아내(이희호 여사)가 청주교도소로 면회를 왔다. 80년 5·17 신군부 쿠데타 때 체포된 나, 김대중(DJ)은 ‘내란음모’ 혐의로 누명을 뒤집어쓴 채 2년 7개월째 옥살이 중이었다. 아내는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만났다고 했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남편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2~3년 병 치료를 하도록 권해 보시라.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도록 하겠다’라고 합니다.”

이런 제안을 받고 아내는 자식과 재야 인사들과 상의한 얘기라며 덧붙였다.

“당신이 한국에 있으면 (감방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외국에 나가 국제 여론을 환기하는 게 낫다는 의견이네요. 그걸 할 수 있는 분이 당신뿐이라고 다들 얘기합니다.”

아내의 권유를 일단 거절했다.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동지들이 남아 있는데 나 홀로 감옥을 벗어나 외국에 나갈 수 없소.”

아내가 다시 설득했다.

“당신이 미국으로 떠나야 구속된 분들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나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수락 조건을 제시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와 광주 민주화 운동 사건에 관련돼 억울하게 구속된 분들을 석방해주면 출국하겠소.”

아내와 동행한 안기부 요원이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출국 수속을 위해 확실한 답변이 먼저 필요합니다. ‘병 치료에만 전념하고 정치활동은 안 하겠다’는 각서를 써주시면 정부에 적극적으로 건의하겠습니다.”

거북한 존재 내치려는 정권의 속셈

1983년 2월 미국 의사당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오른쪽 둘째)이 연설하는 장면.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83년 2월 미국 의사당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오른쪽 둘째)이 연설하는 장면.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아내가 나의 각서를 가지고 상경한 직후, 12월 16일 나는 청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같은 날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했다.

“정부가 김대중 본인과 가족의 희망을 참작해 미국에서의 신병치료를 포함, 관대한 조처를 하는 것은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민화합을 이룩하려는 제5공화국의 의지와 전두환 대통령의 각별한 인도주의적 배려에 의한 결정이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수감된 인사들이 형 집행 정지로 대거 풀려났다. “구시대 및 혼란기의 법 위반자에 대해 우리 사회 발전에 동참할 기회를 준다”는 명분이었다. 어쨌든 정권이 약속을 지킨 만큼 나로서는 출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짚고 넘어가자. ‘본인과 가족의 희망으로’ ‘인도주의적 배려’라는 정부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나를 감옥에 계속 가둬 두기에는 국제사회의 부정적 여론이 부담됐다. 거북한 존재를 내치려는 속셈으로 그들이 먼저 출국을 제안한 것이다.

2년 7개월 옥살이 뒤 강제 출국

12월 23일 밤 미국 노스웨스트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 둘째·셋째 아들과 함께 화물기 계류장에서 비밀리에 탑승했다. 혹시라도 모를 기자들의 동승 취재를 따돌리기 위한 정부의 조치였다. 이륙 직전 비행기 안에서 교도관이 종이를 꺼내 읽었다.

“형 집행 정지로 석방한다.”

2년 7개월여의 감옥생활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72년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탓에 일본에서 망명한 지 꼭 10년 만에 다시 조국을 등져야 했다. 미국으로의 강제 출국, 사실상의 망명이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펴낸 ‘행동하는 양심’ 소식지.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펴낸 ‘행동하는 양심’ 소식지.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워싱턴DC 공항에 도착하니 환영 인파가 마중을 나왔다. 내 사진과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과 플래카드가 보였다. “미국에 온 값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미국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느냐는 정권의 안이한 판단이 착각이라는 점을 일깨워줄 것이다.

조지타운대 병원에서 고관절 부상 등 검사를 받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신병 치료를 위한 인도주의적 미국행”이라는 정부의 발표와 달리 신병을 치료할 목적이 사라졌다. 치료를 구실로 한가하게 무위도식할 수 없었다.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군사 정권에 압력을 가하기에 가장 적합한 나라였다. 미국 정부와 정계·언론계·학계·종교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언론 자유 탄압과 인권 유린 등 한국의 어두운 실상을 알리고 지원을 호소했다. ‘한국의 인권 투사’라며 불러주는 곳에는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려갔다.

카터, “우리는 민주 동지”

해를 넘겨 83년 3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에머리대학에서 ‘한국의 기독교와 인권’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뒤 제임스 레이니 에머리대 총장과 함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났다.

“사형수가 된 저를 구명하기 위해 애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대통령 선거에서 졌단 소식을 듣고 ‘나는 이제 죽었다’ 하고 통곡했습니다.”

카터가 화답했다.

“독재자들이 협박하고 회유해도 굴하지 않은 용기를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는 민주 동지입니다. 함께 나갑시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나처럼 미국에 망명한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자국의 민주화 투쟁을 하던 그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비교적 조용했던 부인(코라손 아키노)이 나중에 대통령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아시아 민주전선’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아키노 의원이 83년 8월 21일 3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닐라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다 암살되는 바람에 공동 민주전선을 구축하려던 꿈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바라본 한국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유린당했고, 인권은 짓밟혔다. 83년 6월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립한 배경이다. 내가 소장을 맡고, 이영작씨 등 10명의 이사를 뒀다. 한국 교민들에게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참여론을 강조했다. ‘인권이 제일 중요하다→인권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3단 논법식 논리를 설파했다. 연구소를 거점으로 삼아 한국의 열악한 민주화 실상을 미국 전역에 퍼뜨려 미국 여론과 정부를 움직이게 한 뒤 이를 다시 한국에 전파하는 게 나의 목표였다. ‘행동하는 양심(Conscience in Action)’ 제호의 소식지도 발행했다.

ABC방송에서 봉두완과 설전

한국의 인권 상황을 미국인들에게 알릴 좋은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돼 있던 그해 11월, 당대 최고의 앵커로 꼽히던 테드 카플(Ted Koppel)이 진행하는 ABC방송 ‘나이트 라인’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카플 측은 “국회 외무위원장인 봉두완 의원이 한국 정부 측 인사로 나온다.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영어가 서툴러 자신이 없다”고 사양했다. “그 정도 영어 실력이면 시청자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카플 측의 계속된 설득에 용기를 냈다. 나는 방송에서 어눌한 영어로 언론·집회의 자유와 선거의 자유가 박탈된 한국의 군사독재에 대해 역설했다.

▶DJ=“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한국의 독재 정권을 격려해주고, 인권 탄압을 용인하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을 실망시킬 방한을 재고해야 합니다.”

▶카플=“미스터 봉(봉두완), 미스터 김(DJ)이 한 말이 사실입니까?”

▶봉두완=“한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정권 때의 지나간 일입니다.”

▶DJ=“한국에서의 인권 유린에 관한 내 발언은 개인 주장이 아닙니다. 미 국무부의 82년도 ‘인권보고서’에 그대로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미 국무부가 거짓말을 했단 얘기인가요?”

결과적으로 레이건의 방한은 성사됐지만 토론은 나의 완승이었다. 영어도 못 하고 쩔쩔맬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미국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나의 영어 실력은 6년여의 옥중 생활에서 한 독학이 전부였다. 진실은 언제나 최고의 웅변이다.

미국 망명 시절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내 모든 노력과 정성을 쏟았다. “값있게 살자”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양심’을 몸소 실천하려 했다. 몸은 떠나 있지만 한시라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다. 망명 2년 차에 접어든 84년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가 한국에 몰아치고 있었다. 더는 미국에 눌러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방인의 삶을 접고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joongang.co.kr/article/25175084)을 보실 수 있습니다.

▶15회 〈목숨을 건 귀국〉이 이어집니다.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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