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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45% 내라"…'횡재세' 유럽 확산, 에너지 넘어 식품까지

중앙일보

입력

유럽연합(EU) 국기와 유로화 지폐를 합성한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연합(EU) 국기와 유로화 지폐를 합성한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유럽 국가들이 앞다퉈 ‘횡재세(windfall tax)’ 걷기에 나서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고금리로 각국 경제가 휘청이는 가운데 큰 이익을 거둔 기업에 고통을 분담하라고 압박 중이다. 범위도 에너지 기업과 은행을 넘어 보험·제약·식품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기준 없는 징벌적 과세란 주장과 살림살이가 어려운 국민 다수를 위한 공정한 조치란 의견이 엇갈린다.

1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컨설팅 기업 KPMG와 미국 조세재단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초부터 최근까지 유럽 전역에서 횡재세가 도입되거나 제안된 사례가 30건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국가별로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24개국이 자국 에너지 기업에 횡재세를 부과했거나 부과할 계획을 갖고 있다.

횡재세는 기업 자체 경쟁력이 아닌 외부 요인으로 인해 거둔 ‘초과 이익(횡재 이익)’에 물리는 세금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가격이 치솟자,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둔 에너지 기업이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유럽에서 커졌다. 이에 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9월 ‘연대 기여금’이란 이름의 횡재세를 도입했다. 2018~2021년 평균보다 20% 이상 이익을 얻은 에너지 기업의 경우 초과분에 대해 최소 33%의 세율을 적용하는 것이 골자다.

에너지·은행 넘어 전방위로 확대 

지난 1월 영국 북동부 게이츠헤드에 있는 로열더치셸의 주유소 모습. AFP=연합뉴스

지난 1월 영국 북동부 게이츠헤드에 있는 로열더치셸의 주유소 모습. AFP=연합뉴스

횡재세는 당초 올해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될 예정이었지만, 유럽 각국은 입법을 통해 시행 시기를 연장하고 있다. 스페인·슬로바키아·헝가리·체코 등이 2024~2025년으로 시한을 늘렸고, 영국은 종료 시점을 2028년 3월까지 5년이나 미뤘다. 영국은 특히 전력기업에 45%의 횡재세를 부과하고 석유와 가스 기업의 법인세율은 내년 1월부터 25%에서 35%로 인상하는 등 자체적으로 징세를 강화하고 있다.

은행도 대표적인 횡재세 표적이다. 인플레이션으로 각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중에 큰 이자 순익을 거뒀다는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이탈리아 정부는 1년 한시로 은행 등 대출 기관이 얻은 초과 이익의 40%를 세금으로 걷겠다고 발표했다. 체코·리투아니아·스페인 등도 비슷한 취지의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거나 할 예정이다.

최근엔 적용 범위가 전방위로 확대되는 추세다. 헝가리는 보험사를 포함한 모든 금융 기관과 제약사들을 횡재세 부과 대상에 올렸다. 포르투갈은 지난해와 올해 초과 이익을 거둔 식품 유통업체로부터 33%의 세금을 걷기로 했다. 모든 기업에 징세하겠다는 국가도 있다. 크로아티아는 2022년 기준 3억쿠나(약 58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낸 모든 기업에 ‘추가이익세’를 물릴 예정이다. 불가리아 역시 올해 7~12월 추가 이익을 낸 기업에 업종을 불문하고 33%의 세금을 걷기로 했다.

“정책 실패하고 징벌적 세금에 의존” 

인플레이션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인플레이션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의 횡재세 확산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우선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이로 인한 경기침체로 유럽 경제가 어려워진 가운데, 살림살이가 빠듯해진 국민 분노를 잠재우려고 각국 정부가 횡재세에 의존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랜트 워델 존슨 KPMG 글로벌 조세 정책 담당은 “(횡재세는) 금리 상승과 (팬데믹 대응에 따른) 정부 지출 증가로 부족해진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라며 “산업 전반에 적용한다면 경제적 피해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나 에나케 조세재단 이코노미스트도 “정상적인 과세표준 없이 특정 산업을 징벌적으로 겨냥한 조치”라며 “국내 산업 육성엔 불이익”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횡재세와 같은 비정상적인 세금에 의존하는 건 자신들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고, 장기적으로 기업의 미래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국민 다수 어려운데…공정한 조치”

지난 3일 영국 런던 영란은행 앞에서 한 시민단체 운동가가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에 항의해 "금리를 올리지 말고 급여를 올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3일 영국 런던 영란은행 앞에서 한 시민단체 운동가가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에 항의해 "금리를 올리지 말고 급여를 올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반면 ‘조세 정의’를 주장하는 쪽에선 전력·식량 등의 가격이 급등하며 국민 다수가 생활고를 겪는 상황에서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의 크리스티앙 할럼 조세 정의 정책 책임자는 “수백만 명이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많은 기업이 기록적인 수익을 올리는 건 공정하지 않다”며 “횡재세는 직관적으로 공정하다”고 강조했다.

일반적인 증세보다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정부 지출 수요가 늘었는데, 업종 간 실적이 크게 갈린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세금을 올려 경제 전체에 부담을 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주장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횡재세를 지지한다. 샤픽 헤버스 IMF 재정 담당 부국장은 “일회성 세금보다 영구적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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