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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내세가불' 청년들, 시한폭탄 됐다 [흉기 든 외톨이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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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현역 일대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 서현역 AK백화점에서 경찰이 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뉴스1

서현역 일대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 서현역 AK백화점에서 경찰이 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뉴스1

흉기를 든 외톨이들 ①

지난 3일 발생한 ‘분당 차량 돌진 및 흉기 난동’ 사건의 가해자 최모(22)씨는 평범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나 특목고 진학 실패 뒤 일반고를 자퇴하고, 가족과 떨어져 홀로 외톨이처럼 지내온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좌절이 2020년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 발병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사회적 고립이 심해지는 악순환 속에 있었다. 최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지난 2일 남긴 인터넷 게시글에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곧 이(異) 세계로 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수사팀 관계자는 “혼자 살던 최씨가 범행 사흘 전 부모님 집에 들어갔다. 혼자 살던 집에 짐이 남아있어 이사를 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웃들은 “매일 모자를 푹 쓰고 다녔다” “오다가다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외톨이였을 줄은 몰랐다”고 최씨를 기억했다.

최씨가 몰던 승용차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졌던 A씨(64·여)가 이날 오전 2시쯤 숨을 거두면서, 사건의 피해자는 14명 부상에서 1명 사망, 13명 부상(중상 11명, 경상 2명)이 됐다. 경찰은 최씨의 혐의를 ‘살인미수’에서 ‘살인 등’으로 변경했다.

온라인 과외 앱을 통해 처음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유기한 혐의로 구속된 정유정(23)이 6월 부산 동래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뉴스1

온라인 과외 앱을 통해 처음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유기한 혐의로 구속된 정유정(23)이 6월 부산 동래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뉴스1

 ‘고립된 외톨이’라는 점은 최씨가 앞서 무차별 살상을 벌인 정유정(24)·조선(33)과 공유하는 공통 분모다. 정유정은 불우한 성장 과정·처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지난 5월 과외앱을 통해 만난 20대 여성의 집으로 찾아가 흉기로 무참히 살해했다. 범행 전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서운한 감정을 털어놨지만, 사과를 받지 못하자 “내가 크게 일을 만들어버리면 나도 죽어야 돼”라는 말을 남긴 채 살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정유정의 살인 동기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검찰 공소장 속 한 문장에 응축됐다.

4명의 사상자를 낸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 피의자 조선이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관악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4명의 사상자를 낸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 피의자 조선이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관악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1일 서울 신림역 인근에서 무차별 흉기 난동을 벌여 20대 남성 1명을 살해하고, 30대 남성 3명을 다치게 한 조선 역시 경찰 조사에서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전과 3범에 소년부 송치 전력이 14건 있는 조선은 현행범으로 체포될 당시 “열심히 살아도 안 되더라고. X 같아서 죽였습니다”라며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최근 사건의 가해자들 모두 자기 감정에 함몰된 사회적 외톨이라는 게 공통점”(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흉기테러 빈발, 살인예고글 봇물…“사회저변 공격성 에너지 응축”

과거에도 고립된 외톨이들의 무차별 차량·흉기 난동 사고는 종종 벌어졌지만, 최근처럼 빈발하진 않았다. “세상에 복수를 하고 싶었다”며 1991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차량을 몰고 질주해 23명의 사상자(사망 2명, 부상 21명) 낸 김용제(당시 21세)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후에는 2008년 논현동 고시원 살인사건, 2016년 오패산터널 총격사건 등이 일어났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최근 연속된 무차별 살상 사건이 사회병리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진단했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사건은 사회 저변에 얼마나 큰 공격성 에너지가 응축돼 있는지 보여준다”며 “세계최고 수준의 자살률로 표현되다가 묻지마 범죄가 빈번·과감해지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사회와 연결된 끈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겁나는 게 없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던 시한폭탄이 이제 터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인범죄를 예고하는 글이 온라인에 봇물 터지듯 난무하고 있다는 점도 전례 없는 현상이다. 경찰은 6일 오후 6시까지 살인 예고글을 올린 54명을 검거했다. “장난”이라고 밝힌 경우가 다수지만, ‘신림역에서 여성 20명을 죽이겠다’고 예고하며 구입한 칼 사진을 올렸던 이모(24·구속)씨는 실제 “신림동 사건 관련 게시글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고 진술했다. 지난 4일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에 흉기 2점을 소지한 채 나타났다가 6일 구속된 20대 남성 허모씨는 행동에 앞서 SNS에 ‘경찰관을 찔러 죽이겠다’는 글을 올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명예교수는 “범행을 벌인 이들과 유사한 입장·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김주원기자

김주원기자

실제로 최근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이들과 모방범죄 예고글을 올렸다 검거된 이들은 대부분 일정한 직업이 없는 20~30대들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건강한 사회생활이 어려운 청년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라며 “최근 사건이 청년층에 집중된 건 경제적 곤란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청년(15~29세) 실업자와 비경제활동 인구는 2020년 81만8000명까지 치솟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종료되면서 지난해 66만 명까지 줄었지만, ‘구직 활동을 하지 않고 쉬었다’는 비경제활동 청년은 2020년 44만8000명에서 지난해 39만명으로 소폭 감소하는 데 그쳤다. 2004년 26만 명에서 꾸준한 증가세가 이어져 온 셈이다.

日 장기불황 이후 '거리의 악마' 닮은꼴…아노미 사회 우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최근의 현상이 1990년대 장기 불황 이후 거리에서 불특정 다수를 무차별 살상하는 이른바 ‘거리의 악마(도오리마·通り魔)’ 문제로 홍역을 앓았던 10여 년 전 일본과 닮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의 범인들은 “이 사회는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1999년 이케부쿠로 흉기난동 사건) “어서 빨리 죽고 싶다”(2001년 이케다 초등학교 살상 사건) “세상이 싫어졌다”(2008년 아키하바라 차량 돌진, 흉기 난동 사건) 등 사회를 향한 분노의 메시지를 쏟아냈다. 7명의 사망자를 낸 아키하바라 사건의 범인 가토 도모히로(加藤智大, 당시 25세)의 경우 다니던 자동차공업사에서 계약을 해지당한 뒤 인터넷 게시판에 비정규직 관련 고충을 여러 차례 토로하기도 했다. 붙잡힌 뒤엔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다. 사는 게 지겹다”고 말했다.

분노사회를 연구해온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사회 주류에서 이탈했다는 소외감 때문에 가치 혼란을 겪다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소외형 아노미’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급히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누구나 공격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회적 신뢰와 행복감이 추락하고, 결국 더 큰 사회 문제를 야기하는 전형적인 아노미 사회로 빠져들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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