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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부터 트럼프까지…韓정부 1호 통역사 '몰두의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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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정부 제1호 통역사이자 세계 국제회의통역사협회원인 임종령(55)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종호 기자

정부 제1호 통역사이자 세계 국제회의통역사협회원인 임종령(55)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종호 기자

대한민국 정부 1호 통역사. 임종령(55)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교수를 늘 따르는 수식어다. 1991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 채용돼 정부 전속 통역사의 길을 열었다. 국내 10명 남짓인 국제회의통역사협회 회원인 그는 30여년간 유엔(UN)총회,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에서 활약했다. 빌 클린턴, 조지 H.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등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비롯해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잭 웰치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 등의 통역을 맡았다.

일한 지 32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 선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폴란드 순방에 동행했고, 부산에서 열린 UN군 참전의 날 및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도 통역을 맡았다. 긴장도가 높은 직업으로 꼽히는 통역사로 오랫동안 일한 비결과, 그 과정에서 얻은 건 무엇인지 지난달 31일 임 통역사를 만나 물었다.

유엔(UN) 총회장 통역 부스에서 임종령 통역사가 동시통역에 앞서 준비하는 모습. 사진 임종령 통역사 제공

유엔(UN) 총회장 통역 부스에서 임종령 통역사가 동시통역에 앞서 준비하는 모습. 사진 임종령 통역사 제공

국제회의 등의 큰 행사는 부담이 클 것 같다. 어떻게 준비하나.
30년 넘게 매일 유지하는 루틴이 있다. 새벽 4~5시쯤 일어나 일간지·경제지를 읽고, 국내·외 뉴스를 듣는다. 밤엔 다음날 맡은 통역이나 강의 준비를 꼭 하고 잔다. 긴장감과 언어 감각을 놓지 않기 위해서다. 행사를 앞두고는 전문 용어와 배경 지식, 시사 상식 등을 숙지한다.
어릴 적부터 영어를 잘했나.
오히려 영어 콤플렉스가 있었다. 10대에 은행에서 일했던 아버지를 따라 브라질에서 4년 가까이 살았다. 포르투갈어만 써서 한국에 돌아와 고등학교에 가니 영어도 한국어도 못하는 아이가 돼 있었다.
그런데 통역사가 됐다.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했나.
대학 졸업 뒤 진로를 고민하던 중 아버지가 "여성도 전문직을 갖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통번역대학원 원서를 건네셨다. 처음엔 영어 뉴스가 안 들려서 3만 3000자 단어책을 통째로 외웠다. 대학원에 가니 원어민 수준의 동기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에게 있는 동물적인 감각이 내겐 없었다. 따라가기 위해 종일 영어 잡지·신문을 읽고 이어폰을 꽂고 단어와 표현을 외웠다. 지금도 공부량을 유지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종령 통역사(오른쪽)는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국을 찾았을 때 3박4일 동안 수행하며 통역을 담당했다. 중앙포토

임종령 통역사(오른쪽)는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국을 찾았을 때 3박4일 동안 수행하며 통역을 담당했다. 중앙포토

전 세계 인사들을 만났던 임 통역사는 에피소드도 많다.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는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 통역과 만찬 사회를 맡았다. 만찬이 끝나고 퇴장을 알리는 멘트를 했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돌연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엄지를 치켜들고 "당신 훌륭했습니다!(You were great!)"라고 외쳤다고 한다. 임 통역사는 "경호원을 포함해 현장의 사람들이 순간 모두 놀랐다"며 "통역할 때 목소리를 기억하고 칭찬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방한 땐 3박4일 곁에서 수행하며 통역했다. 그는 "일정이 끝난 뒤 여왕이 내 이름을 부르고 '네가 가장 고생했다'고 말해줬다"며 "친필 서명한 사진 액자를 선물로 받은 따뜻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동시통역 부스는 보통 회의장 구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 가로 1.8m, 세로 2m 정도의 공간에서 통역사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입으론 통역하고 손으론 메모하는 멀티태스킹을 한꺼번에 해야 한다. 뉘앙스나 행간 의미, 분위기까지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잘못하면 국가 간 분쟁이나 기업 간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어 항상 긴장한다. 기밀 유지와 중립성도 중요한 원칙이다. 임 통역사는 "유연성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연사가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렸다면 적절히 버리는 식"이라고 말했다.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행사장 통역 부스에 임종령 통역사가 서있는 모습. 통역 부스는 공중전화 박스보다 조금 큰 공간이다. 사진 임종령 통역사 제공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행사장 통역 부스에 임종령 통역사가 서있는 모습. 통역 부스는 공중전화 박스보다 조금 큰 공간이다. 사진 임종령 통역사 제공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강조되는 시대이지만, 그는 "간절히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온 힘을 쏟아붓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성취를 위해선 몰두할 시간이 필요하고, 이 경험은 삶을 견고하고 가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최근 펴낸 책 『베테랑의 공부』에서도 강조한 내용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재능이 부족해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노력해서 꼭 획득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워라밸을 찾을 수 있다.
두 딸을 둔 워킹맘이다. 일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양가 부모님에게 아이들을 맡겨야 했고, 입시 정보를 못 챙겨 딸에게 "학군지 엄마를 둔 애들이 부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함께하는 절대적인 시간은 적지만, 퀄리티 타임(짧더라도 강하게 교감하는 시간)의 힘을 믿었다. 딸들과는 메신저로 하루에 수 백통씩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하다.
일을 잘 하려면 단단한 인간 관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회복 탄력성이 좋은 편인데, 가족, 동료 등 정신력을 지탱해주는 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일수록, 성취 압력이 높은 직업일수록 마음을 나눌 사람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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