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은 입맛에 맞는 분에게는 맛있겠지만 대체로 어둡고 찜찜한 느낌이라면, 영화는 더 다채롭고 대중적인 맛이랄까요. ‘웹툰에서도 이렇게 할걸’ 하고 생각한 부분이 있을 만큼 좋았어요.”
이병헌‧박서준 주연의 재난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9일 개봉)의 원작 웹툰 작가 김숭늉(김동균‧38)씨는 영화 시사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지난 3일 김 작가가 소속된 서울 도산대로 박태준만화회사 사무실에서다.
여름 대작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원작 웹툰 '유쾌한 왕따' 김숭늉 작가 #대지진에 홀로 살아남은 아파트 #주민들 집단주의 고발… #학교 무대 웹툰 1부도 드라마로 #대지진 시리즈 줄줄이 출시예정
선택받은 아파트가 생지옥으로…
올여름 한국영화 빅4 중 하나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후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몰려들며 주민들끼리 충돌하는 내용. ‘잉투기’(2013) ‘가려진 시간’(2016)에서 청년세대를 그려온 엄태화 감독이 공동 각본‧연출을 겸했다. 총제작비 200억원대 대작인 데다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주민 대표 영탁 역의 이병헌의 연기가 예고편 등에 공개돼 개봉 전부터 화제에 올랐다. “저는 이 아파트가, 그리고 우리 주민들이 선택받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영탁의 대사에 드러나는 집단 이기주의가 지옥도를 낳는 과정이 블랙코미디처럼 그려진다.
김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2014~2016)는 2부작이다. 1부는 '유쾌한 왕따', 2부는 '유쾌한 이웃'.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2부가 원작이다. 대지진이 덮친 중학교가 배경인 1부도 민용근 감독(‘소울메이트’)과 드라마 ‘D.P.’ 제작진이 뭉쳐 동명 드라마로 제작 중이다. ‘유쾌한 왕따’가 직접적인 원작이 된 앞서 두편에 더해, 대지진 설정이 이어지는 마동석 주연 액션 영화 ‘황야’, 황궁 아파트 생존자들의 물물교환을 소재로 한 드라마 ‘마켓’(가제)까지 합치면 웹툰 한 편에서 출발해 네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탄생한 셈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D.P.’ 등을 만든 SLL 산하 레이블 클라이맥스 스튜디오가 제작한다.
김 작가는 “웹툰을 연재할 당시 엄태화 감독이 '유쾌한 왕따’를 가지고 뭔가 쓰고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4~5년 전쯤 판권 계약이 들어왔다”면서 “이후 1부도 판권 계약을 하면서 웹툰이 점점 확장됐다”고 했다.
- -완성된 영화는 어땠나.
“지난달 말 처음 봤다. 판권 계약을 맺을 때 이미 시나리오가 완성돼 있었는데 느낌이 좋았다. 그 좋은 기분이 영화에도 살아 있더라. 웹툰에서 보여주지 못한 코믹한 부분이 배우 연기로 살아난 점도 좋았다.”
웹툰 1부에서 왕따당하던 중학생은 2부에서 엄마와 함께 사는 아파트로 돌아와 또 다른 폭력에 휘말린다. 영화에서는 왕따 소년 대신 원작에 없던 신혼부부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가 주인공이다. 웹툰에서 ‘김씨’로 불린 주민 대표 영탁, 그와 함께 외부인을 ‘바퀴벌레’ 취급하는 부녀회장 금애(김선영)의 비중도 영화에서는 커진다.
- -웹툰과 다른 점도 많은데.
“주인공이 중학생(동현)에서 신혼부부로 바뀌다 보니 인물의 행동 동기가 다르다. 왕따인 동현은 집단에서 인정받은 경험이 없다 보니, 김씨가 자신을 받아들이자 아파트 주민이라는 집단 소속감에 취해 (윤리적) 판단을 뒤로 미뤄둔 채 행동한다. 민성은 큰 집단(아파트)보단 ‘부부’라는 작은 집단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웹툰보다 더 공감 가는 설정이라고 느꼈다.”
“어릴 때 철거촌…아파트 애증의 대상이었죠”
왜 하필 아파트였을까. 엄태화 감독은 “웹툰 소재가 아파트라는 점이 재미있었다. 1970~80년대 한국사회에 아파트가 대규모로 생겨나면서 나타난 장단점들이 지금의 현실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김 작가는 “어릴 때 철거촌에 살았고 부모님이 철거 반대 시위도 하셨다”고 했다. “원작을 그릴 때까지도 아파트는 살아보지는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동경의 대상이자, 약간 미운 존재였다”며 "뉴스로 접한 사회 분위기도 웹툰에 반영했다"고 했다. “연재 당시에, 같은 아파트 단지인데도,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분양동을) 오 가지 못하게 한다고 울타리로 막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한국 집단주의 특성이 잘 드러난 곳이 아파트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웹툰 1부 ‘유쾌한 왕따’의 내용 역시 김 작가 체험과 관련 있다. 중학생 때 왕따당한 적이 있다는 것. 웹툰 작업은 20대 초반 하도 되는 일이 없어 울적한 마음을 재난물로 달래다 직접 그려보면서 시작하게 됐다. 데뷔작 ‘온 퍼레이드’(2011)는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와 함께 ‘평등한 지구의 종말’이 찾아온다는 설정. 20대 때 머물렀던 고시원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살 냄새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데다, 인사조차 나누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서로 혐오하는 분위기였는데, 웹툰 ‘사람 냄새’(2017)에 서 다뤘다.
김 작가는 “안 좋았던 기억과 감정을 작품에 담기 위해 되새기는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일단 완결하고 나면 그 시절에서 빠져나왔다는 느낌도 든다”고 했다. “극단적인 상황을 그리다가, 인물들의 캐릭터를 곱씹고 결말을 짜다 보면 ‘그래도 최소한 옳은 방향으로 가야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고는 대안을 찾게 된다”며 “소수보다 다수의 뜻이 정의로운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집단이 무조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유쾌한 왕따 3부, 섬마을 종교 소재 구상"
12년간 독립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온 그는 지난해 만화가 박태준의 회사에 합류하면서 액션 웹툰 ‘사형소년’에는 스토리 작가로만 참여하기도 했다. 공동 작업이다. 요괴물인 차기작도 그림 작가는 따로 있다. “언젠가 제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드라마 각본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유쾌한 왕따’ 시리즈는 영화 개봉에 맞춰 지난 6월부터 네이버 웹툰에서 1부부터 다시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현재 3부를 구상 중이다. “이번엔 섬을 무대로 종교 집단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본격적으로 제작에 착수하면 방향이 바뀔 수도 있지만, 집단과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