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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 41.1도에도…"쉬면 누가 일해" 논밭서 쓰러지는 어르신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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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8일 경북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과수원이 수해로 피해를 입은 모습. 김정석 기자

지난 18일 경북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과수원이 수해로 피해를 입은 모습. 김정석 기자

“침수로 병충해 위험이 워낙 커 폭염에도 일을 멈출 수 없는 거예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서평리에서 대파 농사를 짓는 김도환(66)씨는 연일 이어지는 ‘폭염경보’에도 일을 나간다. 31일 청주의 낮 최고기온은 35도를 가리켰다. 김씨는 2만4420㎡(7400평) 밭 위에 비닐하우스 37동을 지었는데 지난 집중호우 때 모두 물에 잠겼었다. 다행히 물은 빠졌으나 농사는 엉망이 됐다. 김씨는 ‘찜통’ 비닐하우스 안에서 어떻게든 대파 한단이라도 살려보려 매일 하루 두 차례씩 소독하며 고군분투 중이다. 그런데도 수확 기미가 보이는 비닐하우스는 2동뿐이다. 김씨는 지난 폭우에 자식 같은 소 8마리도 잃었다.

김씨는 “정성 들여 키웠는데 이대로 방치할 수 없지 않으냐”며 “대부분 피해 농민이 이런 마음으로 (살인 더위에도) 밭에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 특보가 내려진 지난 3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도권기상청에서 예보관이 기온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 특보가 내려진 지난 3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도권기상청에서 예보관이 기온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폭염 속 농작물 살리려 안간힘 

경북 예천군 보문면 승본리에서 고추와 콩·옥수수 농사를 짓는 심민경(58)씨도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있다. 그나마 수해를 견딘, 멀쩡해 보이는 농작물을 살려보기 위해서다.

심씨는 “수해가 덮쳐 올해 농사를 거의 다 망쳤는데 조금이라도 수확하려면 밭에 나갈 수밖에 없다”며 “더워 죽을 것 같아도 일손이 없다. 해가 머리 위에 뜬 대낮 시간만 피해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극한 호우로 피해를 본 농민들이 이번엔 펄펄 끓는 폭염과 사투 중이다. 온열질환의 위험을 알지만 때를 놓칠 수 없어서다. 빗물에 한 번 잠겼던 논·밭은 병충해가 더 많이 발생한다. 축사에 전염병이 돌면 더 큰 피해로 이어지는 걸 농민들은 너무 잘 안다. 그런데 농촌마다 일손은 턱없이 부족하다. 폭염에 취약한 고령 노인들까지 과수원과 논·밭으로 나가는 이유다.

경기 수원시 권선구 수원남부소방서에서 구급대원들이 폭염 대비 물품을 점검하고 있다. [뉴스1]

경기 수원시 권선구 수원남부소방서에서 구급대원들이 폭염 대비 물품을 점검하고 있다. [뉴스1]

쓰러지는 고령 농민들

올해 농촌지역에서 온열질환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지난 29일 오후 4시7분 경북소방본부에 ‘80대 할머니가 과수원에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구급대가 곧바로 경북 김천시 농소면의 한 과수원으로 출동했지만, 이 할머니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 당시 할머니의 체온은 41.1도에 달했다고 한다. 1시간 뒤 문경 영순면의 한 밭에서도 80대 농민이 쓰러져 결국 숨졌다.

소방당국은 지난 주말부터 31일 현재 전국에서 온열질환으로 숨진 사람이 17명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 70대 이상 노인으로 발견 장소가 과수원이나 논·밭이다. 당국은 농사일하러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노약자와 고혈압, 당뇨병, 심뇌혈관질환 등 만성질환자의 경우 폭염 시 밭일 등 야외에서 일하는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무더위로 혈압과 혈당이 높아지면 기존 질환이 악화해 돌연사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열사병의 경우 치료를 제때 받지 않으면 치명률이 100%에 달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으려 논으로 밭으로 나가는 게 현실이다.

지난 18일 경북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과수원이 수해로 피해를 입은 모습. 김정석 기자

지난 18일 경북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과수원이 수해로 피해를 입은 모습. 김정석 기자

반쪽 재난복구비·농작물재해보험

이상기후로 재해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고, 고령화로 일할 사람이 없어진 농촌에서 농민들이 기댈 수 있는 정부 대책은 ‘재난복구비’ 지원과 ‘농작물재해보험’ 등이다. 현행법상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정부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농어업재해대책법’에 근거해 농가 피해를 보상한다. 영농에 복귀하기 위해 농약대, 종묘대·비료대, 농경지 복구비, 농업용 시설비 및 철거비, 농작물 및 가축 폐기비 등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 지원을 100% 받을 수 있는 재해복구비는 농약대뿐이다. 나머지는 농민들이 융자 등을 통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농작물재해보험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의 목소리도 크다. 보상 수준이 낮고 보험료 부담이 크다는 주장이다. 실제 김씨의 경우 지난 2020~2022년 3년간 보험료로 매년 1000만원 넘는 돈을 냈다. 하지만 해당 시기에 태풍과 장마 피해는 없어 올해는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소멸성 보험이다 보니 농민들 입장에선 매년 큰돈이 들어가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농민들 입장에선 현장 실사가 제때 객관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보험사에서 고용한 손해평가사가 손해사정을 하는 과정에서 명백한 피해조차 피해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불신이 커진 이유다.

특전사 1공수특전여단 장병들이 26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방울토마토 재배 비닐하우스에서 집중호우로 물에 잠겼던 비료를 밖으로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특전사 1공수특전여단 장병들이 26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방울토마토 재배 비닐하우스에서 집중호우로 물에 잠겼던 비료를 밖으로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향후 5년 안에 보험 대상 품목 80개로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험가입률이 신통치 않다. 정부가 발표한 ‘제1차 농업재해보험 발전 기본계획(‘23~‘27)’을 보면 향후 5년간 정부는 보험 대상을 확대하고 보험가입률을 6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가입자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균형점을 찾는 것이 먼저라고 조언하고 있다.

김태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농업재해보험의 경우 현재 대상 품목이 70개로 제한되고 있는데 향후 5년 안에 80개 품목으로 늘릴 계획인 것으로 안다”며 “손해사정과 관련해서는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농가 입장에선 보장 수준이 성에 안 차 가입을 꺼리는 것인데 지금은 보장 수준을 현실화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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