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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男연습생 성폭행"…'아육대' 만든 日연예계 대부 두 얼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본 아이돌 대부' 쟈니 기타가와. 숱한 성폭력 가해 의혹을 남기고 2019년 사망했다. AP=연합뉴스

'일본 아이돌 대부' 쟈니 기타가와. 숱한 성폭력 가해 의혹을 남기고 2019년 사망했다. AP=연합뉴스

일본을 호령하는 연예기획사 쟈니스 대표의 성폭력 가해 의혹을 고발했던 지난 4월의 기자회견. 그 장소가 공교롭다. 장소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언론인의 장소인 일본외국특파원클럽(FCCJ)이었다. 일본인에 의해 일본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고발을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하는데, 외국인 특파원들에게 호소를 해야 했던 것.

그 이유는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쟈니스의 설립자, 쟈니 기타가와(ジャニー喜多川, 1931~2019)라는 데 있다. 그의 영향력이 막강한 터라 일본 내에선 1990년대부터 이런 의혹이 불거지고 심지어 법원이 피해를 판결로 인정했음에도 불구, 일본에선 사실상 묵인되어왔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결국 특파원들에게 SOS를 한 셈이다. 지난 4월 기자회견 약 한 달 전, 쟈니 기타가와의 성폭력 의혹을 먼저 보도한 곳도 영국 BBC였다.

4월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은 인물은 쟈니스 소속 아이돌로 활동했던 오카모토 가우안이다. 그는 "연습생 시절 기타가와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구체적 정황과 자료 등을 제시했다. 그는 또 "쟈니 사장의 마음에 들어야 데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쟈니스 연습생 전부가 피해를 입지 않았을까 한다"고 말했다. 소속사 이름 자체가 '쟈니의 것(Johnny's)'이라고 해석되는 점도 공교롭다.

'일본 아이돌 대부' 고(故) 쟈니 기타가와의 성폭력과 관련해 기자회견하는 쟈니스 출신 가수 가우안 오카모토. EPA=연합뉴스

'일본 아이돌 대부' 고(故) 쟈니 기타가와의 성폭력과 관련해 기자회견하는 쟈니스 출신 가수 가우안 오카모토. EPA=연합뉴스

일본에서 쟈니스의 파워는 막강하다. 한 일본 문화 전문가는 익명을 전제로 "쟈니스 없이는 방송 및 연예 콘텐트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맙(SMAP, 2016년 해체)이며 아라시(2019 활동 중단) 등이 쟈니스 소속이다. 국내 방송계에서도 하는 '아이돌 육상 대회' 등의 포맷도 사실상 일본 쟈니스가 먼저 기획한 것. 기타가와 사장은 소속 연예인들에겐 '결혼 절대 금지' 등의 원칙을 강제하기도 했지만, 당시 제일 잘 나갔던 SMAP의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결혼을 선언하면서 원칙에 금이 가기도 했다.

기타가와의 부모는 모두 일본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가 20대였던 6.25 전쟁 당시엔 한국에 잠시 들어와 영어를 가르쳤다는 설도 있다. 미국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고 감동을 받고 연예계 사업의 파워를 체감했고, 31세에 쟈니스를 설립했다. 이후 일본 남자 아이돌의 역사는 곧 쟈니스의 역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성공했다. 기타가와는 가장 많은 1위 히트곡을 보유한 개인이라는 기네스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도 쟈니스 소속 연습생들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유력 매체인 주간 분슌(文春)이 다수의 피해자들을 취재해 기획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후 법원이 피해자들이 당한 것은 동성 간 성폭행이 맞다고 인정했으나, 쟈니스 측의 사과 및 변화로는 이어지지 못한 채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이번엔 외신을 통했던 게 주효했던 걸까. 일본 내에서도 여론화에 성공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달 국회에서 관계 부처 회의를 개최할 것을 약속했고, 이어 정부는 9월까지 각 지자체 관계 기관에 남자 아동이 성폭력 피해를 신고할 수 있는 전용 상담 창구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성행위에 대한 동의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남성의 연령 역시 현 13세 이상에서 16세 이상으로 높였다. 16세까지는 거부 의사를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 반영된 조치다. 쟈니스 소속 피해자들은 대개 10대 초반이었다.

쟈니 기타가와는 결국 2019년 일본 연예계의 대부 타이틀을 유지한 채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추모식엔 일반인을 포함 수만 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 자신은 인터뷰 등을 멀리하며 베일 속에 숨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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