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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영화 같은 독살극 누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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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영국으로 망명했던 전 소련 KGB 요원은 옛 동료의 손에 독살된 것일까.

독극물 중독 증세로 치료를 받아오던 전직 러시아 정보기관 장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44)가 23일 저녁(현지시간) 끝내 사망했다. 리트비넨코가 입원했던 영국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 측은 이날 그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면서 "아직 정확한 발병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BBC 등 외신이 전했다. 리트비넨코의 측근들은 그가 러 정부에 반대하다 독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러 정보 당국은 개입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 독살설=옛 소련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와 그 후신인 러시아연방보안국(FSB)에서 근무하다 대령으로 퇴직한 뒤 2000년 영국으로 망명한 리트비넨코는 1일 제보자로부터 지난달 발생한 반정부 성향의 러 여기자 피살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제공받고 귀가한 뒤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독극물 중독 증세로 중태에 빠져 있던 리트비넨코는 22일 밤 심장마비를 일으켜 인공호흡을 해왔으나 하루 뒤 끝내 숨졌다. 병원 관계자는 지난 주말 그가 독성이 강한 중금속인 탈륨에 중독됐다고 밝혔다. 탈륨은 한때 쥐약 제조에 사용된 독극물이다.

병원 측은 그 뒤 "탈륨이 아니라 방사성 물질"이라는 견해를 밝혔다가 다시 "정확히 어떤 물질인지 더 분석이 필요하다"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리트비넨코의 증상이 독극물 중독에 따른 것임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AFP통신은 24일 병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 "리트비넨코는 방사성 폴로늄에 중독돼 숨졌다"고 보도했다. 리트비넨코는 숨지기 수시간 전에 병문안을 온 친구에게 "그들(크렘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살아남고 싶다. X새끼들이 나를 잡았지만 모두를 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격분했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24일 보도했다.

◆ 용의자는 러시아인=영국 정부는 이번 사건을 자국민에 대한 독살로 규정하고 엄중 수사 입장을 밝혔다. 리트비넨코가 최근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영국 수사 당국은 리트비넨코가 중독 당일인 1일 오후 이탈리아인 제보자로부터 러 여기자 피살 사건 관련 정보를 넘겨받기에 앞서 만난 두 명의 러시아인에 주목하고 있다.

리트비넨코는 이날 오전 전 KGB 동료와 얼굴을 모르는 또 한 명의 러시아인과 런던의 한 호텔에서 차를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인물이 독살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그를 추적하고 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거의 말이 없던 이 인물이 내게 차를 마시라고 몇 번이나 권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타임스는 "러시아는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보안 당국에 외국에서도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률을 올해 채택했다"며 "이번 사건에 러시아 보안 당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한 서방의 의혹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일 유럽연합(EU)과의 정상회의를 위해 핀란드 헬싱키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는 이번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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