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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예비군도 파업선언…사법개편 강행에 이스라엘 '시계제로'

중앙일보

입력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극우 연정이 사실상 사법부를 무력화하는 개편안의 주요 내용을 강행 처리하자 이스라엘 전역이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 노동자 총파업, 예비군 복무 거부 등이 예고된 가운데 네타냐후 정권은 추가 입법도 추진하고 있어 대규모 시위 등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중동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를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사실상 ‘시계제로’에 빠졌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2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뉴욕타임스(NYT)·가디언 등에 따르면, 이날 네타냐후 총리는 사법개편안 일부가 의회를 통과한 뒤 생중계된 TV 연설을 통해 다음 개편안 처리를 위해 야당과의 대화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네타냐후는 사법개편안 처리를 “3부(입법·사법·행정부) 간의 균형 복원 등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날 처리하지 않은 다른 법안들을 언급하면서 “오는 11월 말까지 포괄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야당 측과 대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 회기는 이달 말로 만료되며, 유대교 명절 이후인 10월 재소집된다.

25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아얄론 고속도로를 점거한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5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아얄론 고속도로를 점거한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법부의 '합리성' 판단 권한 폐기 

앞서 이스라엘 의회는 이날 행정부의 주요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사법부의 권한을 폐지했다. 이스라엘은 행정부의 결정이 법과 관례, 국민 정서 등에 반한다고 여겨질 때 대법원이 일정 기준에 따라 판단해 제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타냐후 총리와 극우 연정은 "행정부 권한에 대한 침범"이라며 관련 조항을 삭제했다.

극우 연정 측 의원들은 이날 의사당 곳곳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등 법안 통과를 자축했다. 반면 최종 표결을 보이콧한 야당 의원들은 “네타냐후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총리가 아니다. 극우 연정에 의해 갇힌 죄수”라고 비판했다. 야이르 라피드 야당 대표는 “정부는 전투에서 이겼을 뿐, 전쟁에서 이긴 게 아니다”며 계속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AP=연합뉴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AP=연합뉴스

이날 의사당 밖에서 표결 결과를 기다리던 시위대는 법안 통과 소식에 “물러서지 않겠다”며 맞섰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포함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교차로와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타이어를 불태우는 거리 시위가 자정 넘도록 이어졌다.

텔아비브 도로에선 기마 경찰이 시위대 해산을 시도했고, 예루살렘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악취가 나는 물대포를 쐈다. 이스라엘 경찰은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이날 밤 최소 19명을 체포했다고 전했다.

24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AP=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AP=연합뉴스

의사협회·금융인 등 총파업 돌입

시위대를 지지하는 단체들은 파업을 선언했다. 이날 이스라엘 의사협회는 25일부터 '24시간 파업'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150여 개 대형 기업과 은행 등이 참여하는 이스라엘 비즈니스 포럼 도 하루 총파업을 선언했다. 80만 명이 가입한 노동운동 단체 히스타드루트(이스라엘 노동자총연맹)은 총파업을 예고했다.

1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예비군은 사법부 개편안에 항의해 복무 거부를 선언한 상태다. 이들은 지난 3월 사법 개편에 반대하던 요아브 갈란트 당시 국방장관의 해임을 계기로 극우 연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복무 거부를 선언한 예비군 중에는 시리아 폭격 등 실제 작전에 투입되는 1000여 명의 공군 조종사와 정보·특수부대 병력도 포함돼 안보 상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텔아비브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불을 피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텔아비브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불을 피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경제적인 파장도 예상된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이스라엘 IT 스타트업 70%가 이스라엘의 혼란과 보수화를 우려해 사업 일부를 해외로 이전한 상태라고 보도했다. IT 산업은 이스라엘 경제 총생산의 15%, 일자리의 10%, 세수의 25%, 수출의 50% 이상을 담당할 만큼 비중이 크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증권거래소(TASE)에서 벤치마크 지수인 TA-125 지수는 2.3% 떨어졌고, 세켈화 가치도 하락세다.

법적 공방도 이어질 전망이다. 이스라엘 시민단체인 ‘양질의 정부를 위한 운동’(MQG)은 개편안 통과에 절차적 결함이 있다며 철회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고등법원에 제출했다. 이스라엘 변호사협회도 “대법원에 사법개편안의 폐기를 청원하고 이에 대한 판결이 나올 때까지 시행 보류를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CNN은 “만약 대법원이 사법부 권한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개편안을 무효화할 경우, 정부와 사법부간 대립으로 이스라엘 내 헌법 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美, 유감 표명하며 야당과 합의 압박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 EPA=연합뉴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 EPA=연합뉴스

미국 정부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개편안 처리의 '속도 조절’을 요청하는 성명을 낸 다음 날 개편안이 의회를 통과했다는 점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성명에서 “이스라엘의 평생 친구인 바이든 대통령은 그동안 민주주의에서 주요한 변화가 계속되려면 가능한 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밝혀왔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이어 “우리는 이스라엘 의회 휴회 중에도 광범위한 타협안을 만들기 위한 대화가 몇 주, 몇 달간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야당과의 합의를 요구했다. 미국 유대인위원회(AJC)와 새로운 유대인 포럼(NJF) 등 미국 내 유대인 단체들도 ‘깊은 실망감’, ‘이스라엘 역사의 어두운 날’이라고 극우 연정 측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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