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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기상이변에도, 미·중 기후변화 협력 ‘멀고 먼 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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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호 06면

기후위기 대응 글로벌 리더십 표류

기후변화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기후변화 특사(왼쪽)가 지난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면담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기후변화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기후변화 특사(왼쪽)가 지난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면담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올해 들어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 지역도 연일 역대 최고 기온을 경신하는 등 ‘극한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 폭우 등 기상재해도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온실가스 최다 배출국으로 기후변화에 책임이 큰 중국과 미국은 뾰족한 방안을 모색하긴커녕 대만·공급망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만 증폭시키면서 기상이변 대응을 위한 글로벌 리더십이 표류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유럽은 잇단 고온 현상으로 대륙 전체가 가마솥으로 변하면서 기후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지난 1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는 최고 기온이 48.8도, 사르데냐는 47도, 로마는 41.8도까지 치솟았다. 그리스도 산토리니와 아테네가 41도를 기록했고 스페인에서도 세비야는 41도, 마드리드는 37도까지 올랐다. 한마디로 지중해 전역이 펄펄 끓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와 피렌체 등 10개 주요 관광 도시에 ‘폭염 적색경보’가 발효됐다. 이탈리아 기상청은 이번 폭염에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개로 지옥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의미하는 ‘케르베로스’라는 섬뜩한 이름을 붙였다. BBC 방송은 “과학자들도 폭염이 더욱 극심해지고 보다 빈번해지는 이상고온 현상이 이젠 ‘뉴노멀’이 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미 지역도 마찬가지다. CNN 방송은 미국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억1300만 명이 이상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부터 동쪽으로는 플로리다까지 미 남부 대부분 지역에 고온 경보도 발령됐다.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 북부 데스밸리는 역대급인 53도를, 애리조나 피닉스는 46도를 기록했고 피닉스에서만 12명이 폭염으로 사망했다. 멕시코에서도 지난달부터 최고 기온이 49도에 달하는 폭염이 지속되면서 100명 이상이 열사병이나 탈수로 숨졌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열사병은 체온을 조절하는 중추신경계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발생한다.

아시아에서도 이미 지난 4월부터 인도·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지역은 물론 태국·중국 등에서도 이상고온 현상이 잇따르면서 열사병 등에 의한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 지난 4월에만 179명이 숨지고 450명 이상이 병원에 실려간 것으로 집계됐다. 당시 인도 수도 뉴델리는 40.4도를 기록했고 북부와 동부 6개 도시는 44도가 넘는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40도가 넘으면 아스팔트가 녹아 신발이 쩍쩍 달라붙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온실가스 최다 배출국인 중국과 미국은 위기 극복 행보에 시동조차 제대로 걸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의 2021년 국가별 온실가스 배출 통계에 따르면 중국(32.9%)과 미국(12.6%)이 전 세계 배출량의 거의 절반인 45.5%를 차지했다. 양국이 손잡고 적극 협력하지 않으면 글로벌 차원의 기상이변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현실인 셈이다. 유럽연합 27개국(7.3%)과 인도(7.0%)·러시아(5.1%)·일본(2.9%) 등이 뒤를 잇고 한국도 1.7%(9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미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존 케리 미 기후변화 특사가 지난 16~19일 중국을 방문해 대응 방안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케리 특사는 방중 기간 중국 측 파트너인 셰전화 기후변화 특별대표를 비롯해 리창 총리와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등을 만났지만 관심을 모은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면담은 끝내 무산됐다. 미 대선후보와 국무장관까지 지낸 케리 특사가 기후변화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고도 중국 최고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데 대해 외교가에서는 “베이징의 박한 대접을 받은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양국은 논의 과정에서도 이견을 그대로 드러냈다. 케리 특사는 왕 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기후변화는 미·중 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현안”이라며 “양국은 기후 문제 협력을 통해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고 지구 온난화 대응에도 함께 앞장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왕 위원은 “중국은 양국 관계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후변화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며 양국 갈등 완화가 기후변화 협력의 전제라는 중국 정부 입장을 밝혔다.

중국은 더 나아가 “선진국들이 먼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자금 지원 약속도 지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동안 중국은 기후변화 문제와 관련해 ‘개발도상국 대표’를 자임하며 선진국 책임론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개도국 지원을 늘리라며 서방을 압박해 왔다. 이처럼 양측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케리 특사의 방중은 온실가스 배출 억제 등 기후변화 문제와 관련한 미·중 간 이견을 전혀 좁히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반면 시 주석은 케리 특사가 떠난 다음날인 지난 20일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따로 만났다. 키신저 전 장관은 52년 전인 1971년 4월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해 미·중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고 핑퐁 외교 등으로 양국 국교 수립의 길을 닦아 중국공산당에는 ‘은인’으로 통한다.

게다가 시 주석은 케리 특사 방중 기간인 지난 17~18일 베이징에서 열린 환경 관련 회의에 참석해 온실가스 배출 감축과 관련해 중국의 자율적인 결정권을 강조했다. 시 주석은 연설에서 온실가스 감축 일정과 관련해 “이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사안으로 다른 측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결국 케리 특사는 시 주석 면담을 통해 기후변화와 관련한 미 행정부 입장을 설명하거나 상호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것 대신 언론 보도를 통해 시 주석의 ‘협의 불가’ 의사를 일방적으로 전달받은 모양새가 됐다.

뉴욕타임스도 케리 특사가 방중 기간 베이징 측에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온실가스 감축 속도를 더욱 높이고 석탄 등 화석연료의 퇴출 시한을 앞당기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중국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역대급 기상이변 속에 케리 특사가 중국을 찾았지만 기후변화 논의가 가시적 성과를 내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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