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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공포 부추기고 과학은 삼키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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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중앙SUNDAY 국장

예영준 중앙SUNDAY 국장

아스파탐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발암가능물질’로 분류하자 마트 진열대에는 ‘아스파탐 제로’를 세일즈포인트로 내세우는 막걸리들이 발빠르게 등장했다. 필자의 지인 중에는 그런 제품의 목록을 수첩에 적어다니는 애주가가 있다. 아스파탐보다 백배·천배 강력한 발암물질 에틸알코올을 주성분으로 하는 술은 사발 가득 부어 마시면서도 극미량의 아스파탐에는 불안해하는 이율배반적 행위는 인간의 선택이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익숙한 것에는 둔해지고 새로운 것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생물학적 본능도 불안을 공포로 끌어올린다. 건강과 관련된 문제일수록 이성은 멀고 공포는 가깝게 다가온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것과 같은 이치다. 공포마케팅은 이런 맹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팩트 대신 공포 조장하는 정치권
‘광우병’ 경험에도 국민불안 여전
공포 맞서는 안심마케팅은 실종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이와 유사하다. 공포마케팅의 주체가 기업이 아니라 정치권이고, 노리는 대상이 소비자의 주머니가 아니라 유권자의 표심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15년 전 광우병 사태 때 아주 지독한 공포마케팅을 체험했다. 그것이 잘 기획된 비과학적 선동의 소산이란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 사이 치른 대가는 막대했다. 당시 범민련 간부로 시위 기획자의 일원이었던 민경우씨는 최근 “광우병이 정말 팩트가 맞는지를 놓고 회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며 “국민 건강을 우려해 시위를 한 게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당시의 학습효과가 작용한 때문인지, 당장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더라도 삽시간에 태평양이 오염되고 기형화한 세슘 물고기들이 한반도 연안으로 몰려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뇌송송 구멍탁’ 유의 저열한 비과학적 선동이 그때만큼은 통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불안감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보듯 78%의 국민이 오염수 방류를 걱정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절대적 신봉이란 종교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중은 불안하고, 웨이드 앨리슨 옥스포드대 명예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포가 과학을 집어삼킬’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오염수 방류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안 하는 게 최선이다. 콘크리트로 봉쇄하는 방법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나날이 불어나는 분량을 무한정 감당할 수도 없고, 자칫 지진이라도 만나면 미증유의 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차악(次惡)으로 택한 방법이 방류다. 해양 환경과 생태계, 더 나아가 인체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사실상 결론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믿느냐 안 믿느냐, 혹은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의 선택이 우리에게 남았을 뿐, 현실적으로는 막을 수단이 없다.

문제는 과도한 공포다. 광우병의 추억을 떠올리는 세력의 ‘공포’ 마케팅에 맞서려면 ‘안심’ 마케팅을 펼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정부·여당의 대응은 안심과는 거리가 멀다. 노량진 횟집에 가서 수조 물을 마시는 것은 공포 마케터들의 그것에 비해 한참 하수(下手)의 퍼포먼스다. 연일 ‘괴담몰이’를 윽박지르는 말폭탄 이외에 정부·여당 관계자들에게서 국민에게 안심을 심어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방류 이슈가 과학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온 지도 한참 되었건만, 전문용어 난무하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브리핑 외에는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그 방법이 옳고 그른지와는 별개로, 고속도로 설계 변경 문제로 김건희 여사가 입길에 오르내리자 주무 장관이 즉각 백지화를 선언하고 ‘일타강사’를 자처해 상세한 설명에 나선 것과 사뭇 다르다. 건드릴수록 손해라는 셈법이 작용한 것이라면 더욱 난감하지 않은가. 야권의 공포마케팅이 정부·여당의 무능마케팅과 어우러지면 공포지수는 더욱 상승한다. 그렇게 쌓인 공포가 또 한번 과학을 삼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