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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급 물살, 탈출 불가"…극한호우 늘어난 한국 '지하 공포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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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23년 7월 17일 오전 9시 30분 부산 지역에 호우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부산 동구 초량 제1지하차도에 차량 진입이 통제되고 있다. 초량 제1지하차도는 2020년 7월 23일 시간당 최대 81.6mm의 폭우로 침수돼 차량 6대가 물에 잠기고, 3명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던 곳이다. 장서윤 기자

2023년 7월 17일 오전 9시 30분 부산 지역에 호우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부산 동구 초량 제1지하차도에 차량 진입이 통제되고 있다. 초량 제1지하차도는 2020년 7월 23일 시간당 최대 81.6mm의 폭우로 침수돼 차량 6대가 물에 잠기고, 3명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던 곳이다. 장서윤 기자

“제가 바란 건 우리가 마지막 희생자(유족)였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번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생겼구나…. 다시 그날의 악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에요.”

 2020년 7월 23일, 부산 초량1지하차도 침수 사고 때 친형을 잃은 조일환(58)씨는 17일 이렇게 말했다. 당시 시간당 80㎜가 넘는 폭우에 삽시간에 지하차도가 잠기며 이곳을 지나던 조씨의 형을 포함해 시민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오전 찾은 초량1지하차도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진입금지’ 팻말을 단 출입통제 차단기가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수직 지지대에 매달린 전광판엔 ‘침수발생 진입금지’ 안내가 떴다. 부산 동구청 관계자는 “2020년 참사 이후 수동 차단기를 설치했고, 기상청이 호우경보만 해도 무조건 차단기를 내린다”며 “내부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폐쇄회로(CC)TV도 늘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다른 지방자치단체로까지 확산되진 않았다. 그리고 꼭 3년 만인 지난 15일 청주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에서 또다시 시민 14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조씨는 오송 사건을 언급하며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데, 일부러 뉴스를 못 보게 했다. 저도 오송 사건을 보면서 안에 형님이 있는 것 같아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올해 12명, 지난해 10명…연례행사 된 지하공간 침수 참사

 집중호우 기간 지하차도와 지하주차장, 반지하주택 같은 지하공간 내 침수 참사가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지하공간 침수 사고의 횟수가 잦아지는 건 물론이고, 피해규모도 커지는 양상이다.

이번 집중호우로 청주 궁평2지하차도에서 최소 14명이 숨진 것으로 확인됐고, 지난해에도 지하공간 침수로 최소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 상륙 당시, 포항 인덕동의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서 차량을 지상으로 빼내려던 주민 7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8월엔 서울 신림동 다세대주택 반지하 세대에서 일가족 3명이 쏟아져 들어오는 물살을 피하지 못하고 변을 당했다. 2020년에는 부산 초량동과 대전 판암동 지하차도가 침수돼 총 4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4년 8월엔 부산 온천동 우장춘로에서 침수 참사가 발생해 2명이 생을 마감했다.

 잦은 참사로 시민들 사이에선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포비아(지하공간 공포증)’를 호소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지하차도 참사가 두 차례 일어난 부산에서 15년째 택시기사로 일하는 김모(65)씨는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아예 일을 쉰다. 물이 조금만 찼다 싶으면 손님에게도 못 간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연립주택에 사는 교사 신모(34)씨는 “비 오는 날 지하창고 갈 일이 있으면 겁이 나 남편을 내려보낸다”라고 밝혔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극한호우 심해지고, 지하개발 늘어나고 

 지하공간 침수는 앞으로도 꾸준히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국지적으로 장대비가 퍼붓는 ‘극한호우’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을 포함한 전국 13개 대표 측정지점의 50년간 시간당 50mm 이상 강수일수는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연평균 2.4일이었다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6.0일로 늘었다. 박창근 가톨릭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이제 장마철 등에 국지성 호우가 쏟아지는 건 상수가 됐다”고 지적했다.

지하 개발이 활성화된 점도 침수 사고가 잦아진 배경으로 꼽힌다. “법정 주차대수가 과거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나면서 지하주차장 건설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김경래 아주대 건축학과 교수) “개발 압력이 높은 지역에선 도로 등 시설물을 지하로 집어넣으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분석이 나온다. 국토교통부의 ‘2023 도로·교량 및 터널현황조서’에 따르면 2000년 5만4999m였던 전국 지하차도 총 연장은 2010년 11만4994m, 2020년 21만5510m로 급증 추세다. 2022년에는 23만1857m로 집계됐다. 이번에 참사가 발생한 청주 궁평2지하차도 역시 2017년에 개통된 신축급이다.

 문제는 지하공간이 침수될 경우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지난해 포항 지하주차장 참사 당시 가족 4명을 잃고 홀로 생존한 김모씨는 중앙일보에 “차 밖에서 아들이 문을 열어줘서 겨우 차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라며 “그 이후엔 물살이 너무 세서 벽에 기대 잡을 것을 찾다가 온 팔에 멍이 들었고, 119 구급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도 다른 가족처럼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도 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이나 지하차도를 갈 때마다 식은땀이 나고 숨이 가팔라지는 공황장애 증상이 있어 미리 안정제를 먹어야 한다”라고 했다.

 전문가들 역시 지하공간 침수는 “쓰나미와 같다”고 설명한다. 27년간 수상 구조 경험을 쌓은 한 해양경찰 간부는 이번 청주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 “순간적으로 물이 쏟아진 상황에서 숙련된 잠수부도 물살을 거슬러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하다. 쓰나미급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박명호 한국해양안전협회장은 “물살이 빠르면 차 안에서 문을 여는 건 물론이고 유리창을 깨기도 쉽지 않다”며 “운 좋게 유리창을 깨도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 휩쓸리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성재표 전 창신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하공간 침수 시 차 안에 있을 경우 외부에서 수압뿐만 아니라 토압(土壓)이 작용해 사실상 문을 열기조차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주재승·김태훈 연구원은 2015년 한국방재학회논문집에 수록한「지하공간 침수시 대피능력에 관한 실험적 연구」을 통해 “난간이 존재하지 않는 반지하 주택 등에서 계단 침수심이 35㎝ 이상일 경우 대피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한 “출입문 앞 침수심이 50㎝ 이상일 경우 남성은 출입문을 열지 못 하고, 여성일 경우 40㎝ 이상만 돼도 문을 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난 16일 오후 9시59분쯤 해양경찰청 중앙해양특수구조단 대원들이 침수 참사가 발생한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 지하차도에서 소방 등과 함께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해양경찰청

지난 16일 오후 9시59분쯤 해양경찰청 중앙해양특수구조단 대원들이 침수 참사가 발생한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 지하차도에서 소방 등과 함께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해양경찰청

 지하차도에 대해선 건설 자체를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남기훈 창신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하차도는 배수시설 등을 아무리 강화해도 구조상 갑작스런 유량 증가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미관을 해친다는 등의 이유로 고가도로 대신 지하차도를 쉽게 택하는 경향이 있지만 안전 면에서는 고가도로가 더 유리하다”며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평면도로나 고가도로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참사 반복을 막기 위해선 ▶자동 출입통제시스템 마련 ▶침수예상지역 사전 인지를 위한 교육 등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동현 전주대 소방안전공학과 교수는 “일본에서는 외국인에게도 ‘지역 내 침수 예상지역’을 팸플릿으로 나눠준다. 우리나라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위험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동으로 지하시설 출입통제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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