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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아픈데 진단은 안 나온다...'보이지 않는' 병의 고통[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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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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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메건 오로크 지음

진영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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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흔히 시작과 끝이 있는 ‘전쟁’에 비유된다. 쳐들어온 적에 용감히 맞서 싸워 이기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과 치료를 제대로 받으면 병이 침범해오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바탕에 깔렸다.

하지만 국제관계도 전쟁인지 평화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상황이 있듯, 질병에도 오리무중 상태가 있다. 환자는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는데 의료진은 명확한 진단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흔히 ‘특발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질환은 ‘원인불명’을 가리킨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진단도 힘들고, 치료법을 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거나 증상이 호전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환자 입장에선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다. 불안은 영혼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로 미국의 문학저널 ‘예일 리뷰’의 편집자이자 시인·작가인 지은이는 20대 초반부터 원인불명‧정체불명의 애매모호한 질환을 숱하게 앓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사를 만났지만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병의 윤곽이 잡히지 않아 몸서리를 쳤던 경험은 병보다 더 큰 고통을 주었다. 지은이는 미국 의학계가 암이나 에이즈 같은 ‘강적’과의 전쟁에선 성과를 거뒀지만 ‘심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만성질환’ 앞에선 무력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독일의 병원에서 환자를 이동시키고 있는 모습. [EPA=연합뉴스]

독일의 병원에서 환자를 이동시키고 있는 모습. [EPA=연합뉴스]

지은이가 겪은 만성질환을 살펴보면 이를 재확인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자가면역질환. 세균‧바이러스‧이물질 등 인체에 들어온 외부 침입자를 제거하는 면역세포가 인체 장기‧조직을 이물질로 착각해 공격한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만 2400만~5000만 명이 앓고 있어 주요 질환으로 분류된다.

공격 대상이 췌장이면 제1형 당뇨를, 관절이면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갑상샘이면 자가면역성 갑상샘염을, 전신이면 저닌 홍반성 루푸스병을 일으킬 수 있다. 공격받는 장기나 조직에 따라 100여 가지 질환이 나타난다. 지은이가 이를 앓았던 수십 년 전에는 류머티스성 관절염, 루푸스병, 당뇨 정도가 의학 교과서에 실렸지만 이제는 종류가 더욱 늘고 있다. 만성질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투자를 확대해야 할 이유다.

최근 가수 저스틴 비버가 앓으면서 유명해진 라임병도 지은이가 겪은 만성질환 명단에 올라있다. 진드기가 사람을 무는 과정에서 스피로헤타 문(나선상균 문)에 속하는 보렐리아 균 등이 인체에 들어와 피부‧뇌‧말초신경‧심장‧근골격계에 작용해서, 홍반‧발열‧두통‧피로감‧근육통에 심하면 안면마비까지 일으키는 병이다. 초기에 제대로 치료 받지 않으면 만성병이 된다.

문제는 스피로헤타의 혈액 내 존재를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밝혀낼 검사가 없어 진단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생성에 다소 시간이 걸리는 항체를 찾아 진단할 수밖에 없어 진단 지연과 만성병이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부자이자 최고의 신체 관리를 받고 있을 저스틴 비버가 이 병으로 얼굴이 저렇게 상한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책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의 저자 메건 오로크. 부키 제공 (c) David Surowiecki

책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의 저자 메건 오로크. 부키 제공 (c) David Surowiecki

아무리 쉬어도 피로가 풀리지 않고 오랫동안 중증 장애가 나타나는 '만성피로증후군/근육통성 뇌척수염'(CFS/ME)도 지은이를 비켜 가지 않았다.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병이다. 통상 우울증‧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사실은 아직 신체적‧심리적 이유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으며, 각종 검사에서도 객관적 이상을 찾기 어렵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병원 안내서에도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고 적혀있다. 이런 모호한 질환은 환자를 더욱 불안하게 할 수밖에 없다.

더 문제는 환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프다고 호소하면 과거 의료계에선 ‘잠재된 정신질환의 발현’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의학의 모호성‧불확실성을 인정하는 대신 꾀병이나 마음의 병이라는 틀 안에 넣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다.

의사들은 한때 다발성경화증을 히스테리의 일종으로 여겼다. 결핵은 원인균을 찾기 전까지 ‘낭만적인 젊은 영혼이 걸리는 병’으로, 암은 감정을 억압한 결과 생긴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미국 작가‧평론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수전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사람들은 잘 모르는 질병을 내면 상태의 표출로 간주하며, 심리적인 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대로다. 의학 교과서나 논문에 실리지 않아 의사들은 모르지만 엄연히 실존하는 만성질환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이제 만성질환에 대한 접근법을 달리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전 세계가 바이러스나 세균 감염이 인간 면역계와 충돌해 얼마나 많은 후유증을 남길 수 있는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유도 모른 채 여러 증상에 시달리는 만성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이를 물리치는 사회적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은이의 주장이 울림을 준다. 내가 과거 겪었던 증상이 사실은 이런 만성질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책이다. 원제 The Invisibl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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