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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시각각

美NASA도 못 했는데…손자 숨진 급발진, 할머니가 증명하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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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 디렉터

최현철 사회 디렉터

2018년 5월 4일 오전 호남고속도로 유성나들목 근처. A씨(당시 66세)가 몰던 BMW 차량이 굉음을 내며 급격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내내 시속 80~100km의 속도를 유지하던 차는 금세 시속 200km에 도달했다. A씨는 갓길로 차선을 바꾸고 비상등을 켰다. 그렇게 300m가량을 달린 끝에 나들목에서 핸들을 꺾지 못한 채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A씨와 조수석에 있던 남편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급발진 의심 사고의 전형적 모습이다. 유족들은 당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에 탄 사람들이 모두 숨졌으니 상황을 말해줄 사람은 없다. 사고 5초 전부터의 차량 상태를 기록한 주행기록장치(EDR)에는 ‘100, 99, off’가 반복됐다. 스로틀 밸브가 완전히 열렸고(100%), 가속페달은 끝까지 밟았으며(99%), 브레이크는 전혀 작동하지 않은(OFF) 상태가 최소 5초 이상 유지됐다는 의미다.

'100·99·OFF'의 굴레
급발진 신고 14년간 766건
법원, 2022년에야 첫 인정
입증책임 제조사로 바꿔야

 제조사 측은 이를 근거로 운전자가 당황해서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페달을 계속 밟아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맡은 재판부도 EDR 기록을 토대로 유족의 손배청구를 기각했다. 여기까진 늘 보아 오던 그대로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사고의 장면. 손자(12)를 학원에 데려다주던 할머니가 몰던 소형 SUV 차량이 중앙분리대 화단을 넘은 뒤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농수로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손자는 숨지고 할머니는 중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경찰 조사에서 엔진이 의도하지 않게 급가속하는 상황에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JTBC 2023년 1월 19일 방송 영상 화면캡처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사고의 장면. 손자(12)를 학원에 데려다주던 할머니가 몰던 소형 SUV 차량이 중앙분리대 화단을 넘은 뒤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농수로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손자는 숨지고 할머니는 중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경찰 조사에서 엔진이 의도하지 않게 급가속하는 상황에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JTBC 2023년 1월 19일 방송 영상 화면캡처

 그런데 항소심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2심 재판부는 갓길로 차선을 바꾸고 비상등을 켤 정도로 위기를 느끼고 대응한 운전자가 설령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오인했더라도 5초 이상 계속 밟는다는 게 정상적이지 않다고 의심했다. 오히려 차에 이상이 생겨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고, EDR 기록도 실제 행동과 달리 남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비록 하급심이지만, 1990년대부터 줄기차게 제기된 급발진 주장에 대해 법원이 처음 인정한 순간이다.

 지난달 15일 대전지법도 같은 논리를 적용해 교통사고 사망사건을 일으킨 운전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차량이 정산소 차단기·인도 턱·화분·사람 등 7번 부딪쳤다. 하지만 속도는 시속 10km에서 시작해 시속 68km까지 계속 증가하기만 했다. 13초간 7차례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 와중에 가속페달에서 발을 전혀 떼지 않았다는 의미다. 판사는 이를 운전미숙보다는 급발진 가능성의 근거로 판단했다.

지난달 대전지법에서 무죄가 선고된 그랜져 급발진 상황. 담당 판사는 판결문에 사고 차량의 경로와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며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설명했다. 사진 신진호 기자

지난달 대전지법에서 무죄가 선고된 그랜져 급발진 상황. 담당 판사는 판결문에 사고 차량의 경로와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며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설명했다. 사진 신진호 기자

 실제로 미국에서는 EDR 오작동을 증명하고 재현한 적이 있다. 2007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진 북아웃이 몰던 토요타 캠리 승용차가 급발진하면서 장벽을 들이받아 본인은 중상, 동승자는 사망한 사건에서다.
 결국 사람의 말과 기계의 기록 중 어느 쪽을 신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도 법원이 EDR 기록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제조물책임법 때문이다. 법상 제품의 하자 때문에 손해가 발생하면 제조사가 책임지게 돼 있다. 문제는 하자가 있었는지를 피해자가 증명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깝다. 북아웃 소송에서도 1차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먼저 조사를 벌였지만 별 이상을 찾지 못했다. 뒤에 민간 업체(Barr그룹)가 20개월에 걸쳐 조사하고서야 겨우 하자의 가능성이 드러났을 뿐이다.
 그래서 나오는 대안이 이런 경우 차량에 문제가 없었음을 제조사가 입증토록 바꾸자는 것이다. 지난달 22일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들이 국회 정무위 심사 대상에 올랐다. 그중에는 지난해 12월 급발진 의심 사고로 열두 살 아들 도현이를 잃고, 사고 차량을 운전한 어머니는 형사처벌 위기에 몰린 이상훈씨의 입법청원안도 포함됐다.

 여야 의원들은 한목소리로 법안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안은 일단 보류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민사소송 일반 원칙에 위배되고, 제조사에도 큰 혼란이 생길 것”이라며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급발진 의심 신고는 766건에 이른다. 그중에는 대법관도 있고, 베테랑 택시기사, 손주를 태워주던 할머니, 평범한 주부도 있었다. 사고는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데, 소비자는 대처는커녕 이유를 알 길도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동차는 하염없이 굴러간다. 때론 정상 속도로, 때론 무섭게 급발진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