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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먼저 '3나노' 꺼냈는데…TSMC에 매달리는 글로벌거물,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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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중국 선전(심천)에 위치한 중국 최대 전자상가 화창베이. 전자제품과 관련해 없는 게 없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중앙포토

중국 선전(심천)에 위치한 중국 최대 전자상가 화창베이. 전자제품과 관련해 없는 게 없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중앙포토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판 용산 전자상가’로 불리는 선전 화창베이에서 엔비디아의 A100이 정가의 2배인 약 270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성능을 낮춰서라도 중국이 자급할 수 있는 다른 칩들과는 달리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는 대체재가 없어 부르는 게 값이 됐기 때문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모든 글로벌 고객사들이 엔비디아 제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섰지만 공급이 모자라면서 값이 치솟았다. GPU는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 칩이다. 엔비디아는 전 세계 AI용 GPU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부르는게 값” 엔비디아…알고보니 진짜 甲은

최근 AI 산업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전 세계가 엔비디아의 GPU를 원하고 있지만 공급이 여전히 모자란 이유는 따로 있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대만 TSMC 때문이다. 챗GPT용 GPU로 유명한 엔비디아의 대표 제품 A100, H100은 전량 TSMC가 제작한다.

대만 신추시 TSMC 본사 앞에 걸린 대만 국기가 회사 사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대만 신추시 TSMC 본사 앞에 걸린 대만 국기가 회사 사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초 TSMC는 엔비디아의 요청에 따라 패키징 생산능력을 늘리기로 했다. 일부 외신은 “다급한 엔비디아의 외침에 마침내 TSMC가 응답했다”고 표현했다.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하며 ‘AI 시대의 지배자’로 불리는 엔비디아마저도 TSMC 앞에서는 을(乙)인 셈이다.

엔비디아가 머리를 숙인 배경에는 TSMC가 자체 개발한 패키징 기술 ‘CoWoS(Chip on Wafer on Substrate)’이 있다. 많은 데이터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AI용 칩은 기술적 난이도가 높아 첨단 패키징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단순 포장 넘어 ‘업그레이드’로

반도체에서 패키징이란 쉽게 말해 칩을 포장하는 과정 전반을 말한다. 웨이퍼에 새겨진 반도체 회로를 메인보드와 연결하고 제품화하는 마무리 단계에 속해 후(後)공정이라 불리기도 한다. 최근엔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2 수준으로 제조 초미세 공정이 극한에 도달하면서 반도체 성능을 높이기 위한 대안으로 패키징 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추세다.

TSMC의 CoWoS 기술. 패키징 영역에서 단순한 칩 포장을 넘어 얇은 막 위에 입체적으로 메모리와 로직 반도체를 쌓아올려 큰 폭의 성능 향상을 이뤄냈다. TSMC는 고급 패키징 기술인 CoWoS를 앞세워 애플, 엔비디아 등 주요 팹리스 고객을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사진 Anandtech 캡처

TSMC의 CoWoS 기술. 패키징 영역에서 단순한 칩 포장을 넘어 얇은 막 위에 입체적으로 메모리와 로직 반도체를 쌓아올려 큰 폭의 성능 향상을 이뤄냈다. TSMC는 고급 패키징 기술인 CoWoS를 앞세워 애플, 엔비디아 등 주요 팹리스 고객을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사진 Anandtech 캡처

그런데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단순히 반도체를 포장한다는 개념을 넘어 패키징을 통해 엄청난 성능 향상을 도모하는 등 아예 새로운 차원의 칩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TSMC의 CoWoS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 패키징 과정에서 칩들을 하나의 얇은 막 위에 입체적으로 쌓으면 칩 사이 거리가 가까워진다. 이는 전체 칩의 연결이 빨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고 최대 50% 이상의 엄청난 성능 향상으로 이어졌다. 칩을 어떻게 쌓아 포장하는지에 따라 성능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된 것이다.

TSMC는 2012년 CoWoS 기술을 처음 선보인 이후 패키징 기술을 계속해서 정교하게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그사이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등 서로 성격이 다른 반도체를 묶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이종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까지 등장했다. 이제 엔비디아와 애플, AMD는 TSMC와 그들이 가진 포장 기술 없이는 자사 핵심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입장이 됐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업계에서는 이번 ‘엔비디아 품절 대란’은 패키징 기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해석한다. 이미 생산라인에서 칩이 완성됐지만 수많은 고객사가 CoWoS 패키징 라인을 원하면서 병목 현상이 생겨 엔비디아 제품 출하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파운드리(제조)에 이어 다음 단계인 패키징(포장)에서도 반드시 TSMC에 의존해야만 자사 완제품을 받아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즉, 이제는 생산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미세공정·수율)도 중요하지만 칩을 만든 뒤 패키징 단계에서 얼마나 뛰어난 기술과 서비스를 가졌는지 여부에 따라 고객의 선택이 좌우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TSMC는 CoWoS 말고도 여러 패키징 기술을 갖고 있다. TSMC 외에도 대만의 반도체 패키징 전문 업체들은 이미 글로벌 시장을 장악했다. 이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ASE를 포함해 대만의 전 세계 패키징 시장 점유율은 52%에 달한다.

애플의 ‘괴물칩’ M1울트라도 독점 공급

이처럼 독보적인 패키징 기술은 지난해 삼성전자가 TSMC보다 먼저 3나노 양산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엔비디아, 애플 등 글로벌 거물들이 여전히 TSMC의 생산라인만 바라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TSMC는 칩도 잘 만들지만, 만들어진 칩을 다시 패키징을 통해 ‘업그레이드’ 해주는 서비스에서도 삼성보다 앞서있는 것이다. 이에 AI·자율주행 반도체 관련 대형 주문이 모두 TSMC로 넘어갔고 점유율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는 중이다. TSMC는 지난달 8일 아예 고급 패키징에만 특화한 반도체 생산공장 ‘팹6’ 가동에 들어가며 승부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삼성을 외면하고 TSMC에 칩 생산을 맡긴 배경에는 같은 스마트폰 경쟁사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요인은 패키징 기술력에서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애플이 지난해 공개한 뒤 뛰어난 성능으로 ‘괴물 칩’으로 불렸던 M1울트라 역시 TSMC의 CoWoS 패키징 기술이 적용됐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새너제이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23'에서 최시영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키노트 스피치를 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달 27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새너제이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23'에서 최시영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키노트 스피치를 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삼성은 ‘I-큐브’ ‘X-큐브’로 반격 준비

삼성전자도 칩의 성능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고급 패키징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7일 열린 ‘삼성 파운드리포럼 2023’에서 “패키징 기술을 고도화하는 것은 물론 관련 생태계를 키우겠다”며 TSMC와의 패키징 전면전을 예고했다. 이를 위해 ‘패키징 원스톱 서비스’라는 개념까지 들고 나왔다. 칩의 성능 향상을 원하는 고객사를 위해 맞춤형 패키징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패키징 전용 신규 라인도 신설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3D 큐브 패키징 기술. 여러 개의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2차원의 평면 패널에 펼쳐진 칩과 비교해 데이터 이동 거리가 짧아지는 효과를 얻는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고객사가 원하는 디자인에 맞춰 칩 패키징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삼성전자

삼성전자가 개발한 3D 큐브 패키징 기술. 여러 개의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2차원의 평면 패널에 펼쳐진 칩과 비교해 데이터 이동 거리가 짧아지는 효과를 얻는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고객사가 원하는 디자인에 맞춰 칩 패키징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삼성전자

TSMC의 CoWoS를 뛰어넘기 위해 한층 발전된 개념의 ‘I-큐브’ ‘X-큐브’ 패키징 기술도 개발 중이다. 특히 여러 개의 칩을 수직으로 쌓아 성능을 키우는 3차원(3D) 패키징 분야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지금보다 더 진화한 방식의 반도체 입체 패키징을 준비 중”이라며 “곧 패키징에서도 삼성과 TSMC와 정면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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