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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민감(敏感) 중국어] 간신을 토벌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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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호 31면

민감 중국어

민감 중국어

러시아 민간 무장집단 바그너 그룹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고사성어를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이 즉시 떠올린 단어가 있다. ‘청군측(淸君側)’, 직역하면 임금의 측근을 정리한다는 뜻으로 간신 토벌을 의미한다.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군 참모총장을 간신으로 지목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했으니 21세기에 일어난 로국(露國)판 ‘청군측’이었던 셈이다.

‘청군측’의 출전은 공자(孔子)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魯) 나라 역사를 풀어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정공(定公) 13년(BC 497)에 “임금 옆의 나쁜 놈을 몰아냈다(此逐君側之惡人). 다만 임금의 명령이 없어 반란으로 기록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 역사에 기록된 대표적 ‘청군측’ 은 세 차례다. 시작은 기원전 155년 한(漢)나라 7국의 난이다. 한의 6대 황제 경제(景帝)가 감사원장 격인 어사대부 조조(晁錯)가 제안한 지방 제후 무력화 방안을 채택하자 반란이 시작됐다. 오(吳)·초(楚) 등 일곱 제후가 손잡고 간신 조조를 토벌하겠다며 거병했다. 놀란 경제는 조조를 처단했지만 반란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번째는 유명한 당(唐)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반란, ‘안사의 난’이다. 당 현종(玄宗)이 양귀비에게 흠뻑 빠져 사촌 양국충(楊國忠)까지 득세했다. 군벌 안녹산은 간신 제거를 명분으로 수도 장안으로 진격했다. 755년부터 763년까지 이어진 반란은 당 쇠락의 전환점이 됐다.

세 번째 ‘청군측’은 유일하게 성공한 ‘정난의 변(靖難之變)’이다. 명(明)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장자 상속제를 따랐다. 요절한 황태자의 장남 주윤문(朱允文)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다. 즉위 후 수십 명의 삼촌과 권력을 다퉜다. 주원장의 4남으로 지금의 베이징을 장악했던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나섰다. 부친의 유훈인 ‘황명조훈(皇明祖訓)’의 간신 제거 조항을 앞세워 1399년 내전을 일으켰다. 1402년 수도 남경이 불탔다. 황제가 된 주체는 조카의 측근인 유학자 방효유(方孝孺)를 회유하기 위해 즉위 조칙을 맡겼다. 돌아온 답은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였다. 방효유는 처형당했다.

중국 당국은 러시아의 반란을 ‘바그너 집단사건’으로 명명했다. 상상의 나래를 막은 것이다. 절대권력자의 나라 중국에서 ‘청군측’은 언제나 민감한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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