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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콩쿠르서 역대급 성적…마냥 웃을 수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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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성적은 화려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묘하다.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한국인 대거 입상에 대해서다.

제17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3명 우승 #입상자 총 6명으로 화려한 수상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입지 좁아진 러시아 콩쿠르 #"젊은 예술가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1958년 시작해 올해로 17회째, 꼭 65년을 맞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 연주자들이 29일(현지시간) 승전보를 보냈다. 우승자가 세 명이다. 김계희(29ㆍ바이올린), 이영은(25ㆍ첼로), 손지훈(32ㆍ성악)이 1위에 올랐다. 김계희와 이영은은 이 대회에서 악기 연주로 우승한 첫 한국인들이다. 성악 부문에서는 최현수(1990년), 박종민(2011년)에 이어 세 번째 한국 우승자가 나왔다. 여기에 2ㆍ3위 수상자도 셋이다. 정인호(22ㆍ성악)가 2위, 박상혁(19ㆍ첼로), 김예성(32ㆍ플루트)이 3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는 피아노ㆍ바이올린ㆍ첼로ㆍ목관악기ㆍ남녀성악ㆍ금관악기의 6개 부문에서 열렸는데 그중 3개 부문에서 한국인이 우승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역사가 길고 수상자가 화려한 대회다. 신진 음악가들에게 성공의 관문이고 세계 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기대하는 콩쿠르였다. 1회 대회에서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우승, 러시아와 문화 외교를 상징하며 스타 피아니스트로 떠올랐다. 이후에도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다닐 트리포노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등을 배출했다. 한국 태생 연주자 중에는 정명훈이 74년 피아노 2위,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011년 2위, 같은 해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가 3위 등의 성적을 거뒀다. 따라서 이번 대회의 성적은 한국인 콩쿠르 입상사(史)에서도 돋보인다.

하지만 올해 대회의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발발 이후 콩쿠르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며 선전 도구로 쓴다는 이유로 서방 세계는 이 대회를 비난했다. 세계 국제음악콩쿠르연맹(WFIMC)은 지난해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제명했다. WFIMC 대표 플로리안 림은 “이 대회는 사람들이 러시아 문화의 위대함을 믿게 하며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잊게 한다”고 했다. 연맹 소속 120여 개 대회 중 상위권에 위치했던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국제 콩쿠르 리스트에서 빠졌고, 한국에서는 입상자 병역특례의 특전이 사라졌다.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우승자인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우승자인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이에 따라 대회 참가자들의 인원, 또 국적 다양성이 줄어들고 약화됐다. 직전 대회인 2019년에는 954명, 올해는 742명이 참가 신청서를 냈다. 그중 236명이 본선에 진출했는데 러시아인이 128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중국 음악가도 48명으로 많았다. 2019년엔 9명이었다. 한국 참가자도 줄어 16명이 본선에 출전했다. 김계희는 바이올린의 유일한 한국인 참가자였다.

이번 한국인 우승자들은 대형 국제 콩쿠르에서 이름을 처음 알린 신예들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는 서울대 음대, 뮌헨 국립음대에서 공부했으며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등에서 우승했다. 첼리스트 이영은은 국제 콩쿠르에 처음 참가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중국 톈진의 줄리아드 음악원에 재학 중이다. 손지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뮌헨 국립음대를 졸업했으며 이탈리아 비오티 콩쿠르 우승 경험이 있으며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의 후원을 받는 테너다.

이들은 러시아의 전쟁 상황에서도 기회를 얻기 위해 참가했다고 말했다. 이영은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국제 대회에서 좋은 경험을 쌓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준비를 결정했다”며 "참가자들이 정치적 이슈를 떠나 음악을 공유한 좋은 기회에 수상까지 하게 돼 기쁘다"라고 했다. 테너 손지훈은 “전쟁 때문에 러시아에 입국하는 자체가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마지막 기회이니 후회하고 싶지 않아 참가했다”고 했다. 그는 올해 만 32세로, 콩쿠르에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이었다. 바이올린 우승자인 김계희는 "참가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만 생각하고 왔다. 음악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주고 상처를 치유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첼리스트 이영은.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첼리스트 이영은.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유튜브로 중계된 연주 영상에서 한국인 연주자들은 뛰어난 음악성을 입증했다. 김계희의 스승인 김영욱 바이올리니스트(서울대 교수)는 "김계희는 자신만의 음악을 가지고 있는 좋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재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고 했다.

문제는 대회 이후다. 보통 음악 콩쿠르의 특전은 대회 이후의 연주 기회다. 수십 년 동안 세계 주요 무대와 관계를 맺어온 콩쿠르는 입상자들을 그 무대에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입상자들은 좋은 무대에 서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자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어려울 수 있다. 서방 세계와 관계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주축이었던 러시아의 대부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음악계에서 퇴출 당하면서 입상자들의 특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테너 손지훈.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제 17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테너 손지훈. [사진 콩쿠르 홈페이지]

참가자·입상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미국 반 클라이번 재단의 회장인 자크 마키스는 "참여를 결정한 젊은 예술가들을 탓하지 않는다"고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말했다. 음악 칼럼니스트 한정호는 “게르기예프 비토의 분위기가 여전하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차이콥스키 콩쿠르 프리미엄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진단하면서 “하지만 한국 연주자들은 자신의 연주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선의로 출전했다. 그들의 실력을 제대로 보고 알릴 수 있도록 한국에서부터 양질의 무대를 많이 마련해줘야 한다”고 했다. 현지시간으로  7월 1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수상자 갈라 콘서트가 열리며 유튜브 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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