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고진 24시간 반란, 푸틴 리더십 큰 상처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지 하루 만에 1000㎞를 내달아 모스크바 턱밑까지 진격했지만 돌연 철수했다. 이에 크렘린궁은 프리고진의 벨라루스 망명행과 기소 철회, 반란 가담자에 대한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러시아 초유의 무장반란 사태는 하루 만에 타협으로 일단락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사태 해결 후 첫 언론 인터뷰에서 “‘특별군사작전’(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지만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24일(이하 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 23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이래 ‘가장 격동의 날’이 마무리됐다고 전했다. 이날 바그너그룹은 모스크바에서 500㎞ 떨어진 보로네시주, 350㎞ 거리의 리페츠크주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가다 모스크바 200㎞ 밖에서 진격을 멈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도 함락에 실패한 모스크바가 프리고진의 용병대에게 단 하루 만에 뚫릴 뻔한 순간이었다. 거침없이 돌격하던 용병대는 정부 측과의 협상이 극적 타결되면서 자진 철수했다.

히틀러도 함락 못한 모스크바, 용병대에 하루 만에 뚫릴 뻔

무장 반란을 일으킨 바그너그룹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4일(현지시간) 점령 중이던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철수하면서 시민들과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리고진은 이날 자신의 텔레그램에 “우리는 24시간 만에 모스크바의 200㎞ 이내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며 무혈입성을 주장했다. 이어 “러시아인의 피를 흘리게 하면 책임이 크다”면서 “병력을 되돌려 남부기지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러시아의 맹방인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프리고진과의 20년 인연을 앞세워 중재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타스통신에 따르면 바그너그룹은 이날 점령 중이던 남부 도시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프리고진이 요구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 퇴진 여부는 공개되지 않았다.

로스토프나도누에서 탱크 등을 철수시키고 있는 바그너그룹 용병과 환영하는 지역 주민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FP=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25일(이하 현지시간) 국영 로시야TV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언급 없이 “국방부 관리와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있다 ‘특별군사작전’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으며 이는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이라고 밝혔다.

이번 반란은 지난 23일 오후 시작됐다. 그는 러시아 국방부가 바그너그룹의 후방 캠프들을 미사일로 공격해 엄청난 수의 부대원이 사망했다면서 쇼이구 장관을 응징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 있는 바그너 병력의 절반(2만5000명)을 러시아로 보내 이 같은 무법 사태가 발생한 이유를 파악하겠다”면서 “저항하는 자는 즉시 제거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러시아 국가반테러위원회는 불법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고, 연방보안국(FSB)은 관련 조사를 시작했다면서 용병들에게 프리고진을 잡아 당국에 넘길 것을 촉구했다.

김현서 디자이너

격분한 프리고진은 “‘정의의 행진’을 시작한다”면서 무장 반란을 실행에 옮겼다. 모스크바를 향해 북진하는 동안 러시아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국방부는 “러시아군 중 일부가 바그너그룹을 묵인하며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크렘린궁은 즉시 프리고진 체포령을 내리고 모스크바·보로네즈에 대테러 작전 체제를 발령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엔 당일 오후가 돼서야 서남부 외곽에 기관총 포대를 설치하는 등 뒤늦게 경계를 강화하는 모습이었다. 벨라루스의 텔레그램 미디어 넥스타는 바그너그룹의 북진 과정에서 오히려 러시아군이 항공기 7대 등 상당한 손실을 봤다고 전했다.

로스토프나도누에서 탱크 등을 철수시키고 있는 바그너그룹 용병과 환영하는 지역 주민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24일 대국민 연설에 나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반역에 직면했고 대응은 가혹할 것”이라고 위협했으나 하루 만에 타협해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었다. [로이터=연합뉴스]

다급해진 푸틴 대통령은 24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프리고진을 맹비난했다. 그는 “우리는 등에 칼이 꽂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고 반역에 직면했다”면서 “우리의 대응은 가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또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악마의 부대’로 불리는 체첸군 정예병력 3000명을 배치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 영국 BBC는 “러시아인들은 24시간 동안 무정부 상태를 경험하며 푸틴의 대안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 연설에서 “오늘 세계는 러시아의 보스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며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 프랑스·독일·영국 정상과 통화했다. 백악관은 “이들 정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지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워싱턴=김필규 특파원,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