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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사과 품종은 어디로 갔을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45호 23면

사라져 가는 음식들

사라져 가는 음식들

사라져 가는 음식들
댄 살라디노 지음
김병화 옮김
김영사

과일은 자연 상태에선 보관이 힘들다. 과거에는 물러지거나 맛이 변하기 전에 수확지에서 소비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1870년대 냉동 선박이 개발되면서 대양을 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자들은 저장고의 산소 농도를 낮추고 이산화탄소 농도를 높여 사과와 서양배는 1년 이상, 바나나는 2개월 안팎으로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 뒤 냉장체인이 완성되면서 전 세계 산지에서 집안의 냉장고까지 초고속으로 이어졌다.

영국 BBC 기자이자 음식 저널리스트인 지은이는 이 때문에 바다를 건너가 수퍼마켓에서 팔기에 적합한 품종만 골라 키우는 균일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지적한다. 전 세계의 과수원에서 바나나는 단일종인 캐번디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사과는 저장성 좋고 색깔 선명한 레드 딜리셔스와 갈라, 감귤류는 발렌시아와 네이블 오렌지 등 특정종이 독과점하게 됐다.

‘사라져 가는 음식’의 하나로 책에 소개된 카자흐스탄의 시베르스 사과. [사진 댄 살라디노]

‘사라져 가는 음식’의 하나로 책에 소개된 카자흐스탄의 시베르스 사과. [사진 댄 살라디노]

이는 야구에서 교체 투수 없이 에이스 한 명만 등판시키는 것이나 진배없다. 캐번디시를 공격하는 병충해가 생기면 인류는 바나나를 맛볼 수 없게 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일본·중국 사과 시장에선 70년대 일본에서 육종된 후지(富士·부사) 품종이 지배한다. 새콤함 때문에 애플티나 파이로 만들면 맛이 뛰어난 홍옥이나 아삭한 맛이 일품인 국광은 이젠 구하기도 힘들다. 토종인 능금은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지은이는 야생·곡물·채소·육류·해산물·과일·치즈·알코올·차·후식 등 10개 부문에 걸쳐 34개의 사라져가는 음식과 재료를 파고든다. 그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은 식도락만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즐기는 거대한 맛의 세계가 지속 가능하게 되려면 문화적·산업적·생태적으로 다양성이 필수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닭을 예로 들자. 전 세계에선 매년 690억 마리가 도축된다. 양계장 사육 기간은 심하면 35일까지로 줄었으며, 그 짧은 기간에 체중이 급속도로 증가한다. 사육 닭의 대부분은 1946~51년 미국에서 열린 ‘미래의 닭’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교배 닭의 후손이다. 더 튼튼하고 더 살이 많으며 더 빨리 자라는 품종이다.

일부 기업이 이들의 유전자 권리를 보유하며, 이는 지적재산으로 보호된다. 문제는 유전적으로 균일한 사육 닭은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 2020년 한국에 조류독감이 퍼졌을 때 2000만 마리 이상을 살처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조류독감에 강한 대체종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포기하고 산업적인 고수익만 바라보고 직진하는 바람에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된 것이다.

다양성에는 문화적 이유도 크다. 지은이는 몸집이 작고 느리게 자라는 닭 품종인 한국의 연산(連山) 오계(烏鷄)를 보호하는 이승숙씨를 만났다. “오계는 적어도 700년 이상 우리 선조와 함께해왔다”며 “오계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영혼의 한 부분을 잃게 된다”는 이씨의 말이 울림을 준다.

희망은 있다.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지은이는 조지아의 고집스러운 포도주 제조자 라마즈 니콜라제를 소개한다. 세계 최초의 와인 제조지로 추정되는 서부 조지아 이메레티는 지금도 야생 포도 품종이 발견되고 거의 50가지의 서로 다른 토양이 있는 다양성 천국. 포도나무는 쐐기풀과 콩 덩굴, 그리고 새 둥지 사이에서 자란다. 자연이 주도권을 쥔 이 지역에서 니콜라제는 고대 와인 제조용 테라코타 항아리인 크베브리를 이용해 자연과 인간, 전통과 소비자의 욕구가 조화를 이룬 포도주를 담근다. 포도나무를 군대 사열식으로 줄지어 심어 재배하는 현대 와어너리와는 천양지차다. 100년 이상 된 차나무에서 채취해 가공한 고차(古茶) 푸얼차나 야생 삼림 커피 채취자들도 다양화에 기여하고 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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