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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낭만닥터는 가능할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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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유사 이래 가장 오래된 직업을 꼽으라면 의사를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일은 인류 공동체에서 필수이기에 의사의 가치와 영향력도 우선순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의사와 관련한 제반 규정은 의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의사 직업 출현 이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제반 규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의사 관련 규정은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의정 간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일컬어 정부는 ‘집단 휴진’, 의사는 ‘집단 파업’이라 칭하는 극명한 시각 차이의 배경에는 이렇듯 의료 관련 규정에 대한 현실적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

규정이 의학발전 속도 못따라가
의료소송 염려하며 소극적 진료
낭만닥터 김사부는 이데아일 뿐
의료환경 바뀌지 않으면 힘들어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현행 의료 관련 제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려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규정이란 것은 현실적 효율성 제고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개정될 수 있어야 하는데도 규제 일변도에 고착하기 쉽다. 하긴 우리 사회 곳곳의 이해 못 할 규제가 어디 의료계뿐 이겠는가. 관료제의 병폐야 익히 알려진 역사이니 말이다. 극명한 사례로, 응급실에서 환자 옆에 있는 시간보다 차트 작성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의사의 시간이 더 길다.

의료법상 처치를 적절하게 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의무 기록에 기반한다. 소신을 갖고 처치를 했다 하더라도 의무 기록의 기재 여부는 향후 발생할지 모를 분쟁에 대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환자에게 집중하고 쏟아야 할 의사의 노력은 수세적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고, 차트 작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환자의 치료는 소원해질 가능성이 상존한다. 촌각을 다투는 구급차 안의 환자가 의사를 찾지 못해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현행 의료법은 의사의 소신을 망설이게 한다. 의료소송을 염려해 적극적 치료를 망설이는 의사는 비겁하다는 비판도 감내해야 한다. 이럴 때 의사로서 자괴감은 당연지사.

세간의 관심을 받는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시즌 3)는 의사의 시각에서는 매우 비현실적 이야기이다. 바람직한 한국 사회나 의사상에 대한 시청자의 동경심을 자극한다. 역설적이게도 드라마 제목에 담긴 ‘낭만’은 현실 속 병원이 아니라는 연출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은 거대 자본에 종속되어 가는 병원들이다. 생존을 위해 수익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환경 속에서 지방에 위치한 ‘돌담 병원’과, 그곳에서 인술을 펼치는 김사부라는 인물의 사람 향기 나는 인술은 대부분의 의사가 가고자 하지만 도달하기 어려운 이데아이다.

빌리 조엘의 ‘더 스트레인저’를 철 지난 카세트로 듣는, 아날로그적 삶을 추구하며 김사부는 환자의 생명만을 바라보는 의사로서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그의 선택은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사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기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는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온다. 환자에 대한 진정성으로 가득 찬 ‘돌담 병원’의 이야기를 통해 병원 밖 자본화된 현실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이 통쾌함 때문에 시민들은 ‘낭만닥터 김사부’에 열광할 것이다. 부박한 의사인 나도 그러니 말이다.

위급한 환자를 살리기 위해 태동한 외상 센터는 환자를 받으면 받을수록 병원에 손해가 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극심한 의사 구인난에 비현실적인 수가 때문이다. 지역 거점 외상 센터들이 경영상 문제로 사라지거나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병원 수익과 의사로서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사이 놓인 한국 의료계의 현실은 부정하기 힘든 실존이다.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대한민국에서 필수의료 과목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환자에 대한 보다 무거운 책임, 낮은 처우, 높은 의료사고와 소송 위기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의료계의 현실이다.

드라마 속 김사부가 보여주는 의사는 국민이 바라는 의사의 모습이다. 병원과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의사가 아닌, 환자를 위한 의사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바람을 김사부는 보여주고 있다. 병원이 아닌 환자가 살아야 의사가 산다는 김사부의 발언은 의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직업으로서의 의사가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특수한 직업이기에 소명의식과 가치관 역시 달라야 한다는 명제도 옳다. 그러나 현실에서 발현될 ‘낭만닥터 김사부’는 규제 일변도의 의료 환경이 혁신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