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조선의 세계박람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윤성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성민 정치에디터

윤성민 정치에디터

1880년대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도 세계박람회를 향한 관심은 커졌다. 조선 정부가 신문물을 소개하고 개화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기관지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영향이 컸다. 한성순보의 1884년 기사를 보면 ‘방물(方物)과 토산(土産)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기이한 것을 구경하여 견문을 넓혀준다’며 해외 박람회 소식을 전했다. 기관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 정부도 박람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은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처음으로 공식 참여했다. 미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으로 임명된 정경원을 비롯해 13명이 파견됐다. 이들은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한 달 하고도 닷새를 더 걸려 시카고에 도착했다. 파견된 13명 중 10명은 국악단원이었다. 개막식 날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이 한국관을 지나갈 때 아악(雅樂)을 연주할 계획으로 고종이 보낸 것이었다. 이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틀 뒤 다시 한 달 넘는 귀국길에 올랐다. 계속 머물면 숙박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서양에서 최초의 국악 공연은 그렇게 끝났다.

남은 세 명은 무명천과 발, 삼태기, 자개장롱 같은 것을 전시했다. 어울리지 않았다. 시카고 박람회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서 열리는 박람회였다. 미국이 유럽에 가진 열등감을 떨치고, 자신들의 기술·문화 수준을 뽐내는 자리였다. 미국 백인의 인종적 우월함을 전시하는 ‘인류학 건물’이라는 전시관도 있었다. 일본은 1000평이 넘는 전시관을 꾸미고 미국 관람객의 관심을 사고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의 경연장에서, 그 힘에 휘둘리는 나라의 전시품은 초라하기만 했다. 당시 에모리대학을 막 졸업한 윤치호는 한국관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고 일기에 썼다.

윤석열 대통령과 가수 싸이는 2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2030년 부산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영어로 프레젠테이션(PT)를 했다. 글로벌 기업 총수들이 동행했고, 현대·기아의 전기차가 파리를 돌며 홍보를 한다. 영어를 못해 ‘Korea, Corea 둘 다 틀리지 않지만 Korea로 써주기 바란다’ 등을 글로 써 전시관에 붙여놨던 시카고 박람회 파견단은 130년 후 한국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