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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시작한 미·중…한·중 관계 핵심 변수는 '대만·북한·반도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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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예방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중·미 관계 안정화에 긍정적 역할을 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예방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중·미 관계 안정화에 긍정적 역할을 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우리는 (미·중) 관계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성에 동의한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9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예방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경쟁이 갈등으로 바뀌지 않도록 우리의 차이를 책임감 있게 관리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시 주석 역시 이날 만남에서 블링컨 장관에게 “(미·중이) 구체적인 문제에서 진전을 이루고 합의를 달성한 건 매우 좋은 일”이라고 화답했다. “중국과의 관계가 매우 빠르게 해빙되기 시작할 것”(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지난달 21일 기자회견 발언)이라던 미국의 예고가 양국 간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진 셈이다.

미국은 블링컨 장관의 방중 결과를 한국 측에도 상세히 공유할 예정이다. 크리튼 브링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21일 방한해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들을 만나 디브리핑(사후 설명)에 나선다. 미국이 화상이나 유선을 활용한 결과 공유가 아닌 당국자의 직접 방문을 선택한 건 대중 접근법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의견을 적극 청취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 봉쇄 전략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일본도 미묘한 변화 흐름이 감지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19일 중·일 정상회담 의지를 드러내면서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와세다 대학 강연에서 중·일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중국 방문에 대해서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중·일 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대만해협 문제 등 주요 외교·안보 현안을 놓고 여전히 대립 중이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중국과의 극한 대립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위험제거) 모드로의 전환 가능성에 대비하려는 모양새로 해석된다.

악재 누적된 한·중 관계…"전략적 접근 필요"

미·일 양국이 중국과의 대화 국면을 조성함에 따라 대중 원칙론을 강조해 온 한국의 입장도 주목된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1년 간 전통적 외교 과제인 4강 외교 중 한·미 동맹 강화와 한·일 관계 개선에 집중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한·러 관계는 양자 외교 과제를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고, 대중 외교는 상대적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8월 중국 칭다오시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 회담 당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한국의 사드 배치와 관련 '3불1한'을 요구했다. 외교부 제공

지난해 8월 중국 칭다오시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 회담 당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한국의 사드 배치와 관련 '3불1한'을 요구했다. 외교부 제공

특히 대중 외교가 소외된 사이 한·중 간에는 우호와 협력이 아닌 갈등과 반목이 확대됐다. 지난해 8월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와 관련해선 기존 ‘3불’에 더해 ‘1한’(기배치된 사드 운용 제한) 추가 논란이 불거졌고, 올해 초엔 양국이 상호 단기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등의 악재가 누적됐다. 여기에 최근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베팅 발언’이 나오면서 양국 관계는 더 악화됐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장은 “내년 대선을 앞둔 미국과 청년 실업률이 20%를 넘어서며 경제 상황이 악화된 중국 모두 국내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중 협력 강화를 추진하며 해빙기에 진입하고 있다”며 “대중국 원칙론을 강조해온 정부로선 미·중 관계와 한·중 관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에 대비한 전략적 접근을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韓 '가치외교'와 中 '핵심이익' 충돌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지난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면담에서 내정 간섭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발언을 쏟아낸 이후 한중 경색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김현동 기자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지난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면담에서 내정 간섭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발언을 쏟아낸 이후 한중 경색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김현동 기자

정부도 중국과의 전략적 소통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싱하이밍 대사와 관련한 논란이 불거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한·중 협력을 위한 전략적 소통 채널 복원 시도가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양국 외교차관 협의체인 전략대화를 포함해 각급의 협의 채널을 가동하기 위한 물밑 소통이 이뤄졌고, 연내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를 목표로 3국 부국장급 실무협의도 진행됐다.

이러한 전략 소통 채널 복원은 대만 문제와 북핵 위협, 공급망 재편 등 양국 간의 중장기 과제를 풀기 위한 첫번째 단계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번 블링컨 장관의 방중 과정에서 이 3가지 이슈에 대한 획기적 변화가 나오지 않았지만, 해당 과제는 한·중 관계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핵심 요소이자 해결이 어려운 난제로 꼽힌다.

특히 대만 문제의 경우 이를 ‘핵심 중의 핵심 이익’으로 규정하는 중국의 입장과 가치외교의 연장선에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반대하는 한국의 원칙이 충돌하는 상황까지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대만 문제를 둘러싼 입장차가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상황을 막기 위한 '가드레일' 설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中 반도체, 韓 북핵…'공동이익' 마련해야   

사진은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를 나누는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사진은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를 나누는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또 다른 중장기 과제인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의 공급망 재편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은 양국의 갈등 지점인 동시에 한·중 협력을 통해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경제·안보 현안으로 평가받는다.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해 중국은 시종일관 한·중 협력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지난달 한·중 상무장관 회담 직후 중국은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 영역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는데, 이를 놓고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한 중국의 다급함을 노출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반면 한국에게는 북한의 핵 위협 고도화에 따른 중국의 대북(對北) 역할이 필요하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 역시 지난 19일 방중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북한이 대화에 나서고, 위험한 행동을 그만두라고 압박할 수 있는 특별한 역할이 있다”며 한반도 안보에 대한 중국의 역할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진호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중 관계의 미묘한 변화 흐름이 양국 경쟁 구도의 근본적 변화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최소한 정부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국제 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며 “지금은 대화와 소통을 시작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냉각기인 만큼 중국인 단체 관광 재개 등 핵심 현안과는 무관한 협력 과제를 발굴하고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양국 지도자급 교류의 모멘텀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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