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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우리 손으로 키운 수퍼 전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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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중국 외교부가 “싱하이밍 대사의 한국 각계 인사들과의 광범위한 접촉과 교류는 그 직책 범위 안에 있다”며 싱 대사에 대한 적절 조치 요구를 일축했다. 말인즉 틀린 데는 없다. 그의 전임자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싱 대사가 주재국의 거물 정치인들을 줄줄이 접촉하고 관저에 초청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주중 한국대사가 주재국의 주요 인사를 제대로 못 만나는 게 문제일 것이다. 싱하이밍 사태의 본질은 광폭 접촉 자체가 아니라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한 언행에 있다. 이번에 우리 국민은 말로만 듣던 ‘전랑(戰狼)외교’의 실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반복된 중국 외교관의 무례 언행
두 나라 관계 막히면 야당 이용도
우리 미숙한 대응이 악습관 키워

‘전랑’은 이리 전사란 뜻이다. 단어의 이미지부터가 외교와 모순적이다. 그런데 중국은 모순으로 여기지 않는다. 외교관도 주재국 정부든, 국민이든 싸움을 불사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 혹은 상부의 요구가 있다. ‘외교적 수사’나 ‘외교적 배려’는 필요할 때만 꺼내 쓰면 된다. 전랑외교란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건 영화 ‘전랑2’가 중국에서 대히트한 2017년 무렵부터다. 중국 특수부대의 활약을 소재로 한 그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중국을 모욕하는 자는 반드시 응징한다.”

따지고 보면 싱 대사가 문제를 처음 일으킨 게 아니다. 사드 갈등이 한창이던 2016년 방한한 중국 외교관은 한국 기업인들에게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고 따졌고, 정부·국회의 고위직을 두루 만나며 불만을 터뜨리고 돌아갔다. 그때 그의 직급은 아주사(司) 부사장(부국장급)이었다. 주한 대리대사를 지낸 경력에 비춰 언젠가 한국에 대사로 올 수도 있다. 싱 대사의 전임자 중에 “한국은 중국과 미국 중 양자택일하면 안 된다”고 공개 석상에서 내정간섭인지 훈계인지 모를, 혹은 둘 다에 해당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10여 년 전의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생중계 카메라가 돌아가는 앞에서 싱 대사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었다. 만일 싱 대사의 적절치 못한 발언을 지적하거나 제지했더라면 그건 이 대표의 또 다른 모습을 어필하는 둘도 없는 기회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두 손 모으고 15분간의 발언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요컨대 ‘전랑’의 잘못된 습관은 우리의 잘못된 대응이 키웠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통일전선(통전)을 대단히 중시한다. 자력으로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을 때 우군 세력을 끌어들여 연합하는 전술을 뜻한다. 외교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보수 정권과 관계가 막히면 중국은 야당과 손을 잡는다.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사드를 배치하자 중국은 여당은 제쳐놓고 야당 대표단을 외교부로 초청했다. 방중 일정이 끝날 무렵 야당 의원들은 “와서 들어보니 우리 당이 정권만 잡으면 사드 보복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런 야당이 집권하자 중국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게 ‘3불(不)’ 협의였다. 통전이 무서운 건 통전 대상이 된 사람이나 조직이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번에 중국 정부의 비용을 받고 중국 당정 주최의 행사에 참석해 축사까지 한 민주당 의원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지금쯤 싱 대사는 중국 외교부에서 ‘스타’가 돼 있을 것이다. 조태용 안보실장이 점잖게 “(안보실장의 입장에서) 주한 중국대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국격에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윤석열 대통령이 싱 대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격노를 표출한 뒤라 공허한 발언이 됐다. 참모들은 대통령의 발언을 경쟁적으로 국내 언론에 퍼 나르기 바빴다. 그사이 중국에선 1만 명은 족히 넘을 ‘국장’급의 한 명에 불과한 싱 대사는 일약 대통령이 상대하는 수퍼 헤비급 ‘전랑’으로 올라섰다. 거듭 말하지만 전랑의 잘못된 습성을 키운 것에는 우리 스스로의 책임도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