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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잣대로 혁신 막으면 플랫폼 주권 해외에 뺏길 것” [기득권에 발목 잡힌 혁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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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호 09면

SPECIAL REPORT

지난 15일 구태언 대통령직속 디지털플랫폼 정부위원회 위원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건 중립을 지키는 게 아니라 플랫폼 주권을 넘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기웅 기자

지난 15일 구태언 대통령직속 디지털플랫폼 정부위원회 위원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건 중립을 지키는 게 아니라 플랫폼 주권을 넘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기웅 기자

“렉스 딜라티오네스 앱호레트(Lex dilationes abhorret).” 최근 전문직 플랫폼 스타트업들의 위기를 두고 구태언 대통령직속 디지털플랫폼 정부위원회 위원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뜻의 라틴어법 격언으로 답했다. 법과 제도 등 기존 잣대의 변화 속도는 혁신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 신속하게 합법성을 판단해 줘야 할 정부 주무부처가 입을 닫는 건 혁신 기업의 고사를 방관하는 것이란 얘기다. 구 위원은 “국내 혁신 기업들이 사라지면 기존 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플랫폼 주권을 해외에 내주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15일 구 위원을 만나 신·구 갈등으로 번진 전문직 플랫폼 기업들의 위기를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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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플랫폼 기업들이 어렵다.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오면 적용할 법과 제도가 없는 게 당연하다. 이럴 때 기존에 있던 법과 제도를 확대해서 끼워 맞추면 사업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부각되는 리걸테크를 비롯해 원격의료산업이나 승차공유서비스 등이 모두 마찬가지다. 신(新)산업에 맞춰 법과 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고발과 법정 다툼이 장기화할 수밖에 없단 얘기다. 자본력이 충분하지 못한 신생 기업은 기다리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 승차공유 플랫폼 타다 사례처럼, 시장에서 밀려난 뒤 무죄라고 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런 사례를 봤으니 갈등이 빚어지면 혁신 기업들도 일찌감치 군살을 빼고 장기전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신·구 산업 간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장기화가 불가피한데.
“손 놓고 바라보기엔 플랫폼의 중요성이 너무 크다. 플랫폼 주도권을 두고 전 세계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인공지능(AI)이 촉발한 플랫폼 격변기다. 1990년대 후반 초고속인터넷의 보급과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의 대중화에 이어 10년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혁신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국내 플랫폼 스타트업의 고사를 방관하면, 글로벌 플랫폼 공룡들과 맞설 방법이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가.
“현재 검색은 구글, 동영상은 유튜브, 쇼핑은 아마존 등 분야별로 대표적인 플랫폼이 나뉘어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면, 모든 서비스가 언어모델에 기반을 둔 챗GPT 같은 인공지능을 거쳐 갈 것이다. 예컨대 아침에 출근하면서 도로 상황을 물어보고, 계란이 떨어졌다면 인공지능에 주문해 달라고 하는 식이다. 실제로 오픈AI는 기업들이 자사 서비스에 챗GPT를 접목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 도구(API)를 배포하면서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국내 산업 입장에서 현실적인 문제는 플랫폼엔 국경이 없다는 것이다.”
전문직 플랫폼엔 어떻게 적용되나.
“고급 전문 서비스와 단순 상담을 구분해야 한다. 법률 시장을 예로 들자면, 분쟁 해결이나 소송대리는 인간이 해야 한다. 다양한 노하우가 쌓인 대형 법무법인들의 수요는 여전할 것이다. 반면 간단한 법률 상담은 글로벌 인공지능 플랫폼의 진입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다. 변호사법에선 대가를 받지 않은 법률 상담은 불법이 아니다. 지금도 네이버의 지식 공유 플랫폼인 ‘지식인’에서 변호사들이 무료 법률 상담을 해주고 있다. 챗GPT가 한국어 데이터를 학습해 무료 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면 막기 어렵다. 이에 대항할 국내 리걸테크 기업이 성장해야 미래의 플랫폼 주권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데 기존 산업에서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이런 기업을 막으면, 당장은 효과가 있겠지만 결국 간단한 법률 상담 시장을 고스란히 글로벌 기업에게 넘기게 될 것이다. 의사나 세무사, 공인중개사 등과 갈등이 벌어지는 다른 전문직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주도권이 넘어가면 되돌릴 방법은 없나.
“특정 플랫폼이 시장을 장악하면 다음 혁신이 나올 때까지 판도를 뒤집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과거 스마트폰이 보급될 때만 하더라도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 외에도 노키아나 블랙베리 등이 자체 운영시스템을 갖고 경쟁했다. 국내에선 삼성전자가 자체 운영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시장은 애플과 구글이 양분하고 있다. 이렇게 플랫폼이 시장을 장악하면 이용자 데이터를 대형 플랫폼이 독점하게 된다. 이렇게 쌓인 데이터는 다시 경쟁 우위를 만든다. 지금 주도권을 뺏기면 되돌리기 쉽지 않다.”
해외에선 어떻게 대응하나.
“플랫폼 경제 전쟁에서 지면 ‘법률전쟁’으로 넘어간다. 유럽이 좋은 사례다. 유럽은 구글이 완전히 장악한 지역이다. 인터넷 검색과 쇼핑 등 뭘 해도 유럽 사람들의 데이터가 구글에 모두 기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유럽에선 법을 만들어 대응한다. 유럽에서 2018년부터 시행 중인 개인정보 보호법(GDPR)은 미국과 플랫폼 법률 전쟁법이다. 구글과 메타 등 미국 플랫폼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니 개인정보를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공정거래가 아니라면 과징금을 부과하는 식이다. 한국도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어떤 징후인가.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이른바 ‘구글 갑질 방지법’이 2021년 국회를 통과했다. 한국도 모바일 플랫폼 경제 전쟁에서 대항할 기업이 없으니 법률전쟁에 나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대응하면 우리 기업들도 다 같이 죽는다는 점이다. 구글 갑질 방지법이라고 하지만 법안에 특정 기업에만 적용한다고 규정할 수는 없으니 모든 기업에 적용된다. 그런데 규제가 강력할수록 작은 기업에 더 치명적이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글로벌 기업과 비교하면 국내 기업은 죄다 중소기업이다. 경제전쟁에서 밀려 법률 전쟁으로 전환한 건 사실상의 패배 선언이라고 봐도 되는 이유다.”
해법은 없나.
“법률 전쟁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부 주무부처에서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 기득권이 걸려 있어 예민한 문제라고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건 중립을 지키는 게 아니라 플랫폼 주권을 넘기는 일이다. 타다 사례를 살펴보면 2019년 택시 산업에서 고발할 때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에서 불법이 아니라고 신속하게 판단해 줬다면 어땠을까. 카카오모빌리티 말고도 자율주행과 무인택시 등 미래 모빌리티 산업에서 경쟁할 기업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규제해야 할 경우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켜본 뒤 꼭 필요한 부분에 핀셋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 30년 후 우리 산업을 지킬 기업은 스타트업에서 탄생하는 만큼 낡은 잣대로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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