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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슈즈 신고 고무줄 놀이…황순원 '소나기'를 발레로 만나다 [발터뷰]

중앙일보

입력

안중근 열사에 이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발레로 창작해낸 양영은 대표(오른쪽)가 1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발레연습실에서 주역 김희현 무용수와 고혜주 무용수에게 안무 지도 중이다. 전민규 기자

안중근 열사에 이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발레로 창작해낸 양영은 대표(오른쪽)가 1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발레연습실에서 주역 김희현 무용수와 고혜주 무용수에게 안무 지도 중이다. 전민규 기자

한국 시골 소년·소녀의 첫사랑이 발레로 피어난다. 양영은 비욘드 발레(Beyond Ballet)의 '소나기' 얘기다. 황순원의 동명 소설을 발레로 재해석했다.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남자 무용수들은 파워풀한 점프로 시골 소년들의 순박함을 표현한다. 올해 13회를 맞는 대한민국 발레축제 참가작으로, 양영은 대표가 대본이라는 뼈대에 안무라는 살을 붙여 연출까지 해냈다.  17~18일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을 지난 13일 예술의전당 발레 연습실로 찾아갔다.

사실 『소나기』는 발레로 만들어지기엔 정적인 성격이 강하다. 몸의 한계를 뛰어넘는 발레엔 격정과 드라마가 어울려서다. 양 대표가 각색을 택한 까닭. 소년 소녀가 성장했을 때의 모습을 표현한 캐릭터들을 따로 만들어냈다. 성장한 소녀가 소년을 만나 과거를 회상하며 추는 파드되(pas de deux, 2인무) 등은 기존 발레 문법에도 잘 녹아든다.

양 대표는 "영국 유학 시절, 셰익스피어('로미오와 줄리엣')부터 루이스 캐럴('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문학 작품들이 발레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보며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생각했다"며 "한국 발레의 기량이 높아진 만큼, 우리만의 예술성을 갖춘 창작 작품이 더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는 '안중근, 천국의 춤'으로 입지를 다진 M발레단 단장도 맡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토대로 한 이 작품은 문병남 전 국립발레단 부예술감독이 안무와 감독을 맡아 2015년 초연 후 매년 무대에 오르는 작품으로 뿌리내렸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소나기』를 택한 이유는.  
"6ㆍ25 전쟁이 한창이었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했다.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는 과정 사이 피어났던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고무줄놀이를 좋아했던 아이들은 다 아는 노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가사에도 전쟁의 아픔이 녹아있다. 그런 점을 담아 고무줄 장면도 넣었다. 한국만의 스토리이면서 세계적으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다."  
발레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 역할을 맡은 김회현(왼쪽) 무용수와 어린 시절의 소녀 역을 맡은 정혜윤 무용수. 전민규 기자

발레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 역할을 맡은 김회현(왼쪽) 무용수와 어린 시절의 소녀 역을 맡은 정혜윤 무용수. 전민규 기자

소녀 캐릭터를 어린 시절과 성장한 모습으로 나눴는데.  
"모두들 '소녀가 죽지 않고 살아서 꼭 소년과 사랑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나. 소년의 상상 속에서라도 소녀와의 사랑을 이루는 파드되를 넣고 싶었다."  

원래 무용수를 꿈꿨는데.
"예원학교 재학 중 영국 버밍엄 로열발레단 부속학교에 입학했다. 강점을 살리기 위해 점프를 특히 많이 연습했는데, 입단 직전에 발목 부상을 입었다.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는데, 결국 못한 채 졸업하면서 많이 울었다. 대신 지도자 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왕립무용학교 학부를 거쳐 영국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내 길이 아니었기에 하늘에서 못하게 한 것 같다(웃음)."

발레 '소나기'의 무용수들은 연습에 한창이다. 진유정ㆍ김희래ㆍ김주희ㆍ조윤빈ㆍ이준구ㆍ송정운 무용수가 빚어내는 무대는 17~18일 예술의전당에 오른다. 전민규 기자

발레 '소나기'의 무용수들은 연습에 한창이다. 진유정ㆍ김희래ㆍ김주희ㆍ조윤빈ㆍ이준구ㆍ송정운 무용수가 빚어내는 무대는 17~18일 예술의전당에 오른다. 전민규 기자

영국 발레가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영국도 사실 발레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서다. 그런데도 이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셰익스피어 등의 문학적 토양도 있었지만 (존 메이나드) 케인스 같은 존재가 핵심 역할을 했다."  
경제학자, 케인스 얘기인가.  
"맞다. 케인스는 경제학뿐 아니라 발레의 발전을 위한 지원 단체를 만들어 로열발레단의 초석을 쌓은 인물이다. 로열발레단은 전장에서 포탄을 뚫으며 군인을 위한 공연을 했고, 발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발레를 소개하는 소책자를 만들어 지하철역에서 배포하는 등,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중앙포토]

존 메이너드 케인스. [중앙포토]

케인스는 실제로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음악·예술장려위원회(CEMA)를 설립하며 예술가 국가 지원의 토대를 마련했다. 케인스는 결혼 전에는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였으나, 당대를 풍미한 러시아 발레 무용수 리디아 로포코바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한국 발레도 괄목할만한 기량의 발전을 이뤘는데.  
"선배들 덕에 한국 발레도 눈부신 성장을 했고, 이젠 한국만의 발레를 위한 다양한 길을 개척할 때다. 테크닉뿐 아니라 음악성과 스토리텔링, 조명 및 무대 연출 등을 고민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발레 무용수들에게 어린 나이부터 과도한 테크닉을 요구하는 데 대한 반성의 기류가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양영은 대표 본인도 연습용 천슈즈를 입고 리허설 안무 지도를 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양영은 대표 본인도 연습용 천슈즈를 입고 리허설 안무 지도를 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2015년부터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예술의전당, 예술경영지원센터 등 무용계 지원을 받아 계속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여성 독립투사 캐릭터를 만드는 등, 시대와 호흡하는 무대를 만들어갈 각오다. 찾아가는 작은 무대도 많이 마련하고 있는데, 성동문화재단과 함께 한 무대는 99% 유료판매 기록도 세웠다. 관객분들이 '발레라고 하면 차려입고 가야 하는 어려운 예술인 줄 알았다'며 즐거워 해주시더라. 무용수도 감독도 관객도, 무대가 있어야 성장한다." 
※중앙일보의 ‘발(레인)터뷰’는 발레와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는 코너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제언, 요청, 제보 등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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